문재인 대통령은 4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대기장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11분 환담'을 통해 '톱다운' 방식의 한·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장에 늦게 나타난 아베 총리를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와 얘기를 나눴다. 미국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철회'를 압박하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직접 일본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다. 청와대는 이날 만남을 두고 "한·일 양국 관계의 현안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회동은 사전에 계획돼 있지 않아 일본어 통역도 배석하지 못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일본 측 통역이 아베 총리의 발언을 영어로 옮기면 우리 측 영어 통역관이 이를 문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환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날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준수하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일본 외무성은 환담 후 자료를 내고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에게 양국 관계에서 일본의 원칙적 입장을 확실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일본 언론들도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과 만나 한·일 청구권 협정을 준수하라는 일본 측 입장을 재차 밝혔다"고 보도했다. 지소미아 복원이나 징용 판결에 대한 '플랜 B' 같은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 모친상에 대한 조의(弔意)를 전달하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은 "문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일본은 원칙론을 반복한 것"이라며 "정부가 제시했던 한·일 기업이 조성한 기금으로 위자료를 지급하는 '1+1'안(案)에 한국 정부도 참여하는 이른바 '2+1'안 등 대안을 놓고 접점을 찾지 못하면 파기 수순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일본은 여전히 "한·일 협정부터 준수하라"는 입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소미아 파기를 일본을 압박할 카드로 꺼냈던 정부로선 일본의 지소미아에 대한 소극적 태도가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우리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일본과 대화하려고 하지만, 일본은 설령 지소미아가 종료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정부도 일본이 지소미아 복원에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지지층의 반일(反日) 정서에 역행하면서까지 지소미아 복원을 위한 협상에 나설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미국의 적극적 중재, 일본의 수출 규제 철회를 노린 '지소미아 연계 전략' 자체가 실패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지소미아 파기 이후 한국 정부에만 "지소미아를 복원하라"는 압력을 넣고, 오히려 일본이 이런 미국의 태도를 역이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국무부, 국방부와 달리 백악관이나 트럼프 대통령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지소미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통적 동맹 관계도 폄훼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만 보고 한·미 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편 일본 산케이신문은 이날 정경두 국방장관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방위상이 오는 16~19일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를 계기로 회담하는 방안을 최종 조율 중이라고 보도했다. 정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지소미아 문제와 관련,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이런 것들이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