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중학교 2학년 때 키 180㎝를 훌쩍 넘겼다. 고등학교 시절 매해 10㎝씩 더 자랐다. 주변에서 '저주에 걸렸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큰 키로 할 수 있는 운동이 그만큼 많았으니까.

키 164㎝ 구단 통역과 'V' - 206㎝. 큰 키를 앞세운 GS칼텍스의 새 외국인 선수 메레타 러츠(오른쪽)가 V 리그를 폭격하고 있다. 러츠가 최근 구단 통역 이지언(왼쪽·키 164㎝)씨와 포즈를 취한 모습. 이씨도 작지 않은 신장이지만 러츠의 어깨 높이에도 못 미친다.

206㎝. 올해 GS 칼텍스 유니폼을 입은 메레타 러츠(25·미국)는 역대 국내 여자 프로배구 최장신이다. 그는 이번 시즌 프로배구 4경기에 출전해 리그 공격 종합 1위(46.43%), 득점 2위(91점), 블로킹 4위(세트당 0.571개)를 달린다. 여자부 네트 높이는 224㎝다. 러츠는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올라 상대 코트에 강 스파이크를 내리꽂는다. 웬만한 상대 공격은 그가 살짝 뻗은 '거미손'에 걸리기 일쑤다. 네트 어디를 공략해도 러츠가 지키고 있다. 지난 시즌까지 높이가 약점이었던 GS칼텍스는 러츠의 합류로 개막 4연승을 질주했다.

최근 러츠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통역을 통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수화기 너머로 '안녕하세요'란 말과 함께 깔깔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팀 상승세에 대해 묻자 "비시즌 때 팀 전체가 정말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그 준비가 결실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트라이아웃에서 탈락했던 러츠는 올해 차상현 GS칼텍스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프로 첫해였던 지난 시즌엔 이탈리아 2부리그 소속으로 뛰었다. 1년간 어떤 부분이 발전했느냐고 묻자 러츠는 "대학 시절 많이 안 했던 후위 공격을 중점적으로 연습했고, 2단 볼이나 클러치(접전) 상황 대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민첩성이 다소 부족한 그의 약점은 수비. 러츠는 "몸을 날려 공을 받아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정확한 위치에서 공을 기다리려고 한다"고 했다.

러츠는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스탠퍼드 배구부 '레드 셔츠'에서 5년간 뛰며 학부 땐 생물학을 전공했고, 질병 역학(疫學) 석사 학위를 땄다. 어릴 때부터 수학·통계를 좋아했다고 한다. 공부와 배구를 병행하기 쉽지 않았을 터. 러츠는 "시즌 중엔 쉬운 과목, 비시즌 땐 어려운 과목을 몰아 들었다. 학점은 좋은 편이었다"며 "학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배구로 풀며 두 일의 균형을 맞췄다"고 했다. 배구 코트를 떠난 후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S)나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러츠는 글로벌 정유회사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세계 곳곳을 돌았다. 그 때문인지 한국 온 지 4개월밖에 안 됐는데 금세 적응한 모습이다. 된장찌개와 쌈밥을 좋아하고, 한국 사람도 먹기 어렵다는 매운 라면도 먹는다. 러츠의 한국 음식 '먹방(먹는 방송)'이 배구 팬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한국말을 잘 못해서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게 아쉽다"고 했다. 통역 이지언씨는 "시즌 중이라 러츠가 따로 한국어 공부를 못 하지만 매일 한두 단어씩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 배운 말은 '아우, 추버라(추워라).' 경상도 출신 동료 김유리(28)가 사투리로 알려준 한국어였다.

지난해 6월 미국 스탠퍼드대 석사 학위를 받고 활짝 웃고 있는 러츠.

인터뷰 내내 러츠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코트 안팎에서 늘 미소를 잃지 않고 주변에 밝은 에너지를 준다. 웃음의 비결을 묻자 "어릴 때부터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좋은 팀에서 좋아하는 배구를 맘껏 하고 있어 더 많이 웃게 된다"고 했다. 러츠는 큰 키 때문에 어딜 가나 주목받았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작은 소망을 말했다. "단순히 키 큰 선수가 아니라, 배구를 정말 즐기고 사랑하는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 '미소 천사'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