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달 북극점에서 1338㎞ 떨어진 북극해의 한 얼음산 앞에 섰다. 북극점과의 거리가 한반도 직선 길이(1178㎞)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실상 북극이다.

'인류 최후의 저장고'로 불리는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Svalbard Global Seed Vault·SGSV)'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모습으로 적막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곳은 세계 주요 식량 종자를 보관하는 장소다. 세계 최대 규모 유전자 은행인 SGSV는 혹시나 인류가 전쟁·전염병 등으로 지구 환경을 망가뜨린 끝에 곡식이 자취를 감출지 모를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해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한네스 뎀페볼프 세계작물다양성재단 수석연구원은 "후손들에게 지금의 식량 작물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했다. 이곳은 노르웨이 유전자센터가 설립을 주도해 2008년 2월 문을 열었고 북유럽유전자자원센터(NordGen·노르젠)가 운영을 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약 80개 나라와 연구소가 씨앗을 맡겨두었다. 종자 보관은 무료다.

이 보관소가 스발바르에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녹지 않는 땅'이라는 환경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7월 이 마을에도 지구온난화의 공포가 스며들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순록 200여 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지난겨울에 때아닌 비가 스발바르에 내렸고,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는 과정에서 풀이 얼음 속에 파묻혔다. 풀을 먹지 못한 순록이 집단 폐사했다.

북극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는 해발 130m 지점에 수평으로 146m 깊이 터널을 파서 만들었다. 얼음산 중턱에 지어 영하 온도가 유지된다(맨 위 사진). 종자 보관소에는 식물 6007종 씨앗 약 5억5000만개가 보관돼 있다(아래 가운데). 조진호 탐험대원이 국제종자보관소로 향하던 중 ‘북극곰 주의’ 표지판을 만났다(아래 오른쪽).

종자 보관소의 씨앗은 안전할까. 이에 대한 답을 찾아 스발바르의 스피츠베르겐섬 롱이어비엔에 엿새 동안 머물렀다. 북극곰 수가 인간보다 많은 인류의 최북단 마을(2000명 이상 거주 기준)은 그 자체로 거대한 냉동고 같았다. 10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24시간 사위가 어두운 흑주(黑晝)가 이어진다. 노르젠 소속 아스문드 아스달 SGSV 운영·관리 책임자는 "낮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올해 씨앗을 맡긴 마지막 나라인 슬로바키아의 종자를 입고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씨앗 금고'엔 전 세계 식량 작물의 씨앗 품종 6007개가 철통 보안 속에 보관돼 있다. 씨앗 수는 약 5억5000만개에 달한다.

저장고는 200년 후를 내다보고 만들었다. 해발 130m 지점에서 수평으로 146m 길이 터널을 파고 그 끝에 터널처럼 생긴 창고 3개를 지었다. 핵폭발과 리히터 규모 6.2 강진, 소행성 충돌에도 견디게 강화 콘크리트로 감쌌다. 발아(發芽)를 막기 위해 영하 18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무적'이라 부름 직한 이 저장고도 지구온난화의 피해를 본 적이 있다. 2017년 여름 창고 3곳 중 1곳 입구로 동토층에서 녹은 물이 흘러드는 일이 벌어졌다. 핵폭발과 소행성 충돌은 예상했어도, 북극 마을의 눈이 녹아내릴 줄은 상상조차 못해 방수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다. 북극은 지구의 기후변화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렌즈'라고 한다. 최근 20년간 평균 기온이 4~5도 상승해 지구 전체 평균보다 5배 이상 빠르게 기온이 치솟고 있다.

아스달씨는 "일차로 저장고 방수 처리를 했고 내년엔 시설을 더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라고 했다. 종자를 지키는 이들의 믿음은 굳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류가 어느 날 정말 지구를 망가뜨렸을 때 이곳에 보관된 종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오래된 종자가 발아하리라고 100%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어두컴컴한 낮, 아직은 언 땅 위에 서서 저장된 씨앗이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