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 문화부 기자

앞머리가 긴 남자를 처음 신문에서 봤을 때 그는 터틀넥을 입고 서재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제법 번듯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TV에서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말투도 조근조근 부드러웠다. '앙가주망'처럼 어려운 단어를 잘 쓰는 걸 보니 아는 것도 많아 보였다. 호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뭘 물어도 속 시원히 답하는 법이 없었다. 말장난을 했고 희한한 변명을 늘어놨다. 듣다 보니 지겹다 못해 화가 났다. 그 무렵에 다른 남자를 알게 됐다. 곽철용이었다.

이름도 투박하게 철용(鐵龍)이었다. 재간 좋은 네티즌들은 그의 이름을 영어로 비틀어 '아이언드래건'이라고 불렀다. 13년 전 히트했던 영화 '타짜'에 등장한 인물인데, 다들 그가 재밌다고 이제 와서 난리였다. 유튜브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평정했다는 곽철용의 어록 동영상을 찾아봤다. 앞머리 긴 남자보다 나이도 많고 얼굴은 별로구나 싶었는데, 웬걸. 하는 말마다 '사이다'였다. 66일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가방끈이 길어 보이진 않았다. "내가 달건이 생활을 열일곱에 시작했다"고 했으니까. '달건이'란 하는 일 없이 놀면서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누구처럼 독립유공자 자손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을 텐데, 부끄러운 과거를 숨김없이 털어놨다. "그 나이 때 달건이 시작한 놈들이 백명이라 치면 지금 나만큼 사는 놈은 나 혼자뿐이야.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감탄했다. 일개 달건이로 살아온 남자도 애쓰고 노력해야 이긴다는 공정 경쟁의 기본 법칙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고 외치는 걸 보면 사랑꾼이기까지 했다. 앞머리가 긴 남자가 "제 가족 일로 대통령님과 정부에 부담을 드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온 국민 앞에서 처자식과 자신은 일심동체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때, 곽철용은 화란이와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불붙은 섶에 뛰어들 기세로 외쳤다. "화란이 네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 그때는 내가 깡패가 되는 거야!"

파고들수록 볼매(볼수록 매력 덩어리)였다. 평생 도박판에서 굴러도 당당했다. 상대가 꼼수를 부려 그의 돈을 따내도 판을 엎네 뒤집네 하질 않았다. 상대에게 깨끗이 돈을 주면서,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라고만 했다. 철수의 잘잘못을 가려보자 하면 "영희는 뭐 다 잘했느냐"고 받아치는 경우를 요즘 너무 많이 봐서일까. '신사답게 행동하라'는 그의 허세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최근 햄버거 광고에까지 등장한 명대사 "묻고 더블로 가!"도 그렇다. 이전에 잃은 건 잊고 두 배로 더 따내겠다는 얘기인데, "지표는 좋아지고 있고 우리 경제는 아직 튼튼하다"고 우기는 분들이 차라리 곽철용처럼 말하면 어땠을까. 그간의 실수와 과오를 다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 그냥 묻고 더블로 갑시다!"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뉴스를 보며 매번 울화통을 터트리진 않았을 것 같다.

곽철용은 "올림픽대로가 막히는데요"라는 말에 "마포대교는 무너졌냐"고 대꾸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우악스러워도 대안을 내놨다. "네가 올림픽대로가 나쁜 길이라서 막힐 거라고 예단하고 내사부터 했다며?"라고 우기지도, "올림픽대로가 막히긴 해도 세계 교통의 어려움 속에서 그래도 선방하고 있다"는 뜬소리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끌렸나 보다. 아이언맨은 물론이고 제대로 대화할 줄 아는 어른 하나 만나기 어려운 세상. 아이언드래건의 속 시원한 일갈을 들으며 깔깔거리고 싶었던 것이다. 앞머리 긴 남자와 기타 등등이 안긴 피로가 다 잊힐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