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까지 거제시 장목면 장목지서 앞에는 작은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당시 답사 중이던 동아대학교 교수 김동호와 군청 공무원 이승철이 돌다리 아래를 거울로 비춰보니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었다.

'적 함대를 맞아 모든 함대에 알린다. 즉시 출동해 적을 격멸코자 한다.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다. 헤이하치로(接敵艦見之警報聯合 艦隊欲直出動擊滅之 本日天氣晴朗波高 平八郞)'

1905년 5월 27일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에서 러시아 함대를 발견했다고 본국으로 보낸 전보 내용이었고, 비석은 1931년 도고 헤이하치로의 친필을 받아 거제도 송진포에 세웠던 러일전쟁 승전기념비였다.

대한해협에서 울릉도 근해까지 이틀 동안 펼쳐진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5년 뒤 일본은 세계열강 묵인 속에 조선을 병탄했다. 조선 식민화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이 해전이었고, 그 전투를 지휘한 일본 사령관이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郞)였다.

훗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함대에 사용했던 전법은 임진왜란 한산대첩 때 이순신이 구사했던 학익진(학 날개처럼 함대를 횡으로 펼치는 전술)이었고, 도고는 이순신을 누구보다 존경했다고. 그리고 이순신이 일본 해군을 궤멸시켰던 한산도 해전은 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고.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근거 없는 전설이다. 이순신을 둘러싼 전설과 신화를 전·현직 해군사관학교 교수진 논문을 중심으로 검증해 본다.

이순신을 극찬한 일본 해군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함포 외교로 개항한 이래 일본 지도부에게 절실한 것은 군사력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착수한 일본은 강병(强兵)을 첩경으로 삼았다. 적이었던 미국과 영국으로 군인들을 유학 보내고 군함을 제작하고 근대 포격술을 도입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등장한다.

전남 목포 고하도에 있는 이충무공기념비를 모신 모충각. 1597년 정유재란 직전 모함으로 계급장을 떼인 이순신은 백의종군 도중 복직 명령을 받고 명량해전에서 압승했다. 모친상을 당하고 아들까지 잃은 이순신은 서해 북쪽 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가 고하도에 107일간 머물며 조선 해군을 재건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은 육군에 비해 초라한 해군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이순신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친 군신(軍神)으로 추앙했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군신으로 부각되면서 이순신에 대한 열기는 급속도로 사라졌다.

사토 데쓰타로는 일본 군사 교육가 겸 사상가였다.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일하면서 사토는 자기가 쓴 '제국국방사론'을 교재로 사용했다. 이순신 관련 부분은 이러했다. '동양에서는 한국 장수 이순신을, 서양에서는 영국 장수 넬슨을 들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조선에서 태어나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지만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사토 데쓰타로 '제국국방사론' 1908: 김주식 '이순신에 대한 일본인의 연구와 평가', 2011, 재인용)

이에 앞서 역시 해군 출신인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제국해군사론'(1898)이라는 대중 서적과 '해상권력사강의'(1902)라는 교재를 통해 이순신을 장교들에게 소개했다. 오가사와라에 따르면 이순신은 '일본군이 반 걸음도 서진하지 못하게 한 장수'이고 '잘 싸울 뿐 아니라 만사에 장군다운 기량을 갖춘 사람'이었다.(김준배 '메이지시기 해군장교의 저술 속 이순신', 2018) 특히 사토는 '넬슨은 이순신과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장수며 인격과 천재적 창의성 면에서 이순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들이 굳이 당시 300년 전 조선 장수를 끄집어낸 의도는 따로 있었다.

일본 해군 확장을 노린 이순신 찬양

300년 전 적국 장수를 찬양한 이유는 이러했다. '이순신을 높이고 일본을 꾸짖고 욕하는 것은 분개심을 느끼게 하려는 게 아니다. 무엇이 괴로워 자기 얼굴을 향해 침을 뱉겠는가. 조선을 지켜 국운 쇠락을 면하게 한 사람은 조선의 넬슨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의 전략이었다. 올해 안에 우리 제국이 세계 경쟁의 장에 발을 들여놓는 이상 입국의 방침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세키 고세이, '조선이순신전', 1892: 김준배, '근대 일본 이순신, 넬슨 비교 담론의 등장과 변화', 2017, 재인용)

경남 거제시청에 보관 중인 러일전쟁 승전기념탑 부분.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가 보낸 전문을 헤이하치로 자필로 적어 1931년 새겼다. 존폐를 두고 한때 논란이 일어 지금은 창고에 보관 중이다. 기념탑은 해방 후 파괴됐고, 이 석판은 돌다리로 사용되다가 1971년 발견됐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철저한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를 시도하던 일본이었다. 그런데 그 근대화 주도 세력은 육군이었다. 1893년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던 일본 해군은 해군참모본부 창설을 시도했지만 육군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오가사와라는 해군 수뇌부의 명으로 '제국해군사론'을 저술했다. 집필 목적은 '진실로 해군 확장을 도모하려면 먼저 해상 권력의 필요성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김준배, 2018) 오가사와라는 저서 곳곳에서 '해상 권력이 쇠하면 침략을 받았다' '해상권을 장악당하면 항해 통로는 완전히 단절된다'고 주장했다.

섬나라 특성상 해군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폴레옹과 넬슨이었다. 1805년 나폴레옹 군단을 트라팔가르에서 저지한 영국 제독 넬슨은 일본 해군의 롤모델이었다.

1880년대 나온 책들에는 넬슨에 대한 영웅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모든 국가가 당해내지 못했지만 하늘이 영국에 넬슨을 내려 그를 저항하게 했다.' '나폴레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영웅의 실력은 백중지세여서 겨룰 수 없다.' 그런데 나폴레옹에 비유되는 영웅 히데요시도 결국 이순신에게 패했다.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해 일본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나폴레옹은 넬슨의 해군에 제압당했다.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김준배, 2017)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나폴레옹에, 그 히데요시를 막아낸 이순신을 넬슨에 비유해 해군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해군력 확대라는 목적 관철을 위해 '참군인 이순신'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등장과 이순신

러일전쟁 승전기념탑 부분. '적을 발견했으니 격멸하겠다'고 적혀 있다.

그러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듬해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은 러일전쟁의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틱함대는 울릉도 앞바다까지 쫓긴 끝에 항복했다. 그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이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더 이상 이순신을 끌어내 '일본 제국 해군'을 확장할 이유가 사라졌다.

책과 강의실에서 이순신을 극찬했던 중장 출신 해군 사토 데쓰타로는 1926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조선에 이순신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일본 본토에 이 사람에 비견할 수 있는 장군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원통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하지만, 그다음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다행히 세계 제일의 명장 도고 원수가 역사를 새로 장식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다시 한 번 유쾌해진다.'(해군중장 사토 데쓰타로, '절세의 명해장 이순신', 1926: 김주식, 2011, 재인용) 마침내 이순신을 대체할 일본 군신(軍神)이 나온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이순신을 넬슨에 비교하던 풍조는 급격히 사라졌다. 대신 '동양의 넬슨 장군으로 칭송받는 우리 도고 헤이하치로 장군', '일본의 넬슨이시여 축복을' 같은 '도고 헤이하치로=넬슨'이라는 등식이 일본 사회에 자리 잡았다. 서양의 근대 군사력에 압도돼 있던 일본이 마침내 자기 나라 영웅에 의해 그 열등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김준배, 2017)

우쭐하되 그릇된 이야기

첫째, 그 군신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찬양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러일전쟁 승리 축하연에서 '나를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헤이하치로 어록과 축하연 공식 기록, 언론 매체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에피소드다.(김주식, 2011)

1964년 일본에서 나온 '일한중 삼국연대의 역사와 이론'이라는 책에 처음 언급된 이 에피소드는 이후 '1906년 미 해군사관학교 학생에게 한 말'(이순신 역사연구회, '이순신과 임진왜란', 2005), '친일파 기업인 이영개가 헤이하치로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한 말'(후지이 노부오, '이순신각서', 1982) 등으로 내용과 정황이 뒤죽박죽되며 재생산됐다. 그 어디에도 출처가 없다.

둘째, 서구사회의 이순신 평가. '이순신=넬슨', '히데요시=나폴레옹' 공식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영국인 제임스 머독이 그대로 인용해 '동양의 나폴레옹과 넬슨'으로 유럽으로 전파됐다. 1921년 영국 해군 중장 조지 밸러드 또한 머독을 인용해 '제독 이순(Yi-Sun)'을 넬슨에 비교했다.(석영달, '이순신 해외 전파의 연결고리: 제임스 머독의 '일본의 역사'', 2019) 현재 인터넷상에 '서구 학자들이 찬양한 이순신'으로 검색되는 내용은 이순신의 이름도 제대로 인용하지 못한 이 밸러드의 책이다.

셋째,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의 학익진을 원용했다는 말. 도고 함대가 사용한 전법은 '정자(丁字) 전법'이다. 종대로 항해하는 적 앞에서 횡으로 늘어선 뒤 맨 앞의 배를 집중포격해 격침시키는 전술이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도고 함대는 개전 30분 만에 러시아함대 선두 스와로프호를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옛 병서 '노지마류 해적 고법'이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이 책에는 '초전 적 선두 제압' '학익진' '호랑이진' '표범진' 같은 표현이 들어 있었다.(이종각, '일본인과 이순신', 이상, 2018) 그 옛날 왜구들 전법을 응용했다는 말이니, 이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한산대첩이 세계 4대 해전'이라는 이야기. 해군사관학교 교수 석영달은 '세계 4대 해전의 근거에 대한 고찰'(2016)이라는 논문에서 '미국, 프랑스, 독일 해군사관학교와 일본 방위대 파견 졸업생 그 누구도 '4대 해전'을 배우지 않았고, 임진왜란 해전은 언급도 없었다'고 했다. '영국 왕립해군대학은 4대 해전이라는 용어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석영달의 결론은 '영웅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노력과 부주의가 만든 우물 안의 담론'이었다. 신화가 없어도, 이순신은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