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명예교수·비폭력연구소장

만해 한용운(1879~1944)은 1935년 무렵 '반성'이라는 짧은 글에서 자기책임론을 논했다. 그는 사람이 망국 등의 불행을 만나게 되면 흔히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한다(怨天尤人·원천우인)고 하면서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만해는 사람의 가난과 약함의 책임이 다른 부자나 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듯이, 망국의 책임도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만고를 돌아보건대,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는가…. 망국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망국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또다시 정복당한다고 했다.

침략을 당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멸한 다음 침략을 당하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반성의 첫걸음이다. 이는 강자의 논리가 아니다. 만해처럼 망국을 직접 겪고 그 한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침략자를 탓하고만 있겠는가? 그는 망국의 원인을 제거하여 다시는 당하지 않게 대비하는 것, 그것이 한을 제대로 푸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런 자기책임론은 '한용운 공소공판기'(1920)에도 나온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오. 우리나라가 수백 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문명에 뒤떨어진 것이 합하여 망국의 원인이 된 것이오." 조선의 부패한 정치와 현대문명에서 낙후된 조선 민중을 망국의 두 원인으로 꼽고 있다. 망국은 참으로 우리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만해는 또 '조선불교유신론'(1910)에서 세력이 진리를 이기는 문명을 '야만적 문명'이라고 부르면서 "도덕과 종교에 입각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찬양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어 "우열승패(優劣勝敗)와 약육강식이 또한 자연법칙임을 부정할 길은 없다"고도 했다. 인간 본성과 진리에 반하지만 현실 세계에 '야만적 문명'은 실존하고, 그들이 더욱 큰 힘을 가졌을 때 힘없는 국가와 민족은 종속과 피지배의 사슬을 피할 수 없다. 만해는 이럴 때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 즉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력이라 함은 군사력과 경제력, 외교력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세력이 꺾이면 자유도 평화도 없어지는 것이다.

자유와 생명과 평화를 노래했던 만해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어떤 말을 던질까. 그의 생전에는 남북 분단과 6·25전쟁은 없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3대 세습 왕조가 필사적으로 개발한 '민족의 보검'이자 절대반지인 핵무기도 없었다. 같은 동포인 북한 사람들이 자유와 인권의 탄압 속에서 고통받는 신음도 듣지 못했다. 이런 야만적 문명이 북한 동포를 넘어 남한을 위협하는데 우리의 '세력'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힘은 키우지 않으면서 과거 우리를 침략했던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만 부풀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종종 흉(凶)하다고 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을 닮기란 어렵고 흉한 자가 되기는 쉽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흉한 자가 너무 많지 않은가. 만해의 생각을 갖고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이 보일 것 같다. 지금 시기 꼭 만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