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코펜하겐 외스터브로 지역의 한 주택. 중학생 자녀 둘을 키우는 걸다(40)씨는 가슴 통증과 함께 숨이 가빠지자 우리나라의 119 격인 112에 전화를 걸었다. 응급 구조 대원이 걸다씨의 나이와 건강을 묻는 사이 인공지능(AI)이 숨소리 간격, 통증을 호소하는 목소리, 주변 소음 등을 분석해 심장마비가 예상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AI는 구조대에 출동 경보를 울리고 걸다씨의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했다.

덴마크에선 이런 AI가 응급종합상황실과 구급차, 병원 응급실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덴마크 의료계에선 빅데이터, 딥러닝, 수술 로봇이라는 말도 흔히 쓴다. 부산대 의예과에 재학 중인 나는 AI가 도입된 후 의사의 역할이 궁금했다. 인간 의사는 AI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까. 답을 찾기 위해 AI 의사가 가장 발달해 있다는 덴마크로 갔다. 인구 577만명의 이 작은 나라는 미국, 싱가포르 등과 함께 세계 3대 바이오 강국(2018년 사이언티픽아메리칸 조사)이다. 대한민국은 26위였다.

◇AI는 의사의 조력자

코펜하겐에 위치한 의료기기 회사 코르티(Corti) 사무실 곳곳에는 호박 모양의 둥그렇고 하얀 조명이 놓여 있다. 유명 디자이너 작품 같지만 3년 전 개발된 심장마비 진단 AI 기기인 '코르티'라고 했다. 덴마크에는 수십 여 곳의 응급종합상황실, 구급차, 종합병원 등에 코르티가 있다. 코르티는 사람은 듣기 힘든 미세한 환자의 숨소리·말소리를 분석해 심장마비를 예측한다. 심장마비 예측 정확도는 92%, 사람 의사는 73%다. 이 회사 안드레아스 클레브 CEO는 "심장마비는 발병 후 10분 내에 생사가 결정된다"며 "AI는 피로나 집중력 저하에 따른 실수도 없다"고 했다.

제약회사 레오 파마(LEO Pharma)는 피부 질환 진단에 AI를 도입했다. 이 회사 의약개발부 존 지버트 팀장은 휴대전화로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여기 나오는 게 제 손인데 건선증에 걸린 모습입니다.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해 치료되는 과정까지 한번에 볼 수 있어요." 회사가 개발한 휴대전화 앱 '이매진'은 질환 부위의 사진을 찍으면 어떤 질환인지를 알려준다. 아토피성 피부염을 보이는 팔 부위를 휴대전화로 찍어 앱에 올리면 실제 아토피성 피부염이 맞는지 일치율을 알려주는 식이다.

몸에 착용하는 기기로 질병을 진단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제약회사 룬드벡(Lundbeck)의 개발팀 크리스티안 브라센씨는 신발 하나를 책상에 올렸다. 그는 "신발 깔창에 17~20개의 압력 센서가 있어 환자가 발을 디뎠다 뗄 때 어디에 무게가 실리는지를 분석하고 걷는 속도 등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얻은 데이터는 컴퓨터에 축적, 분석돼 환자의 건강 상태가 호전되는지 악화하는지 등을 의사가 직접 환자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고 했다. 회사는 이를 이용해 보행 장애를 보이는 파킨슨병을 예측할 수 있다.

◇전 국민 의료 기록 수집·전산화

덴마크가 바이오 강국이 된 비결은 규제 완화였다. 덴마크는 세계 최초로 40년 전부터 국민의 의료 기록을 수집해 전산화하고 2013년부터 이를 포털사이트 '선드헤드닷디케이(Sundhed.dk)'를 통해 전 국민에게 공개했다. 2500만 환자 표본의 바이오 뱅크(인체자원은행)도 있다. 공공 목적이나 학계 연구를 위해선 익명으로 자료가 제공된다. 기업도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과의 산학(産學) 협력 등을 통하면 방대한 자료를 활용해 AI 의료의 질을 높일 길이 열려 있다. 연구개발과 제품화가 촉진돼 산업 전체에 활기가 돌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를 관리하는 포털 혁신 부서의 제이콥 우펠만 팀장이 포털에 접속하자 그가 받은 검사·진단, 처방약, 주치의 등 모든 의료 기록이 화면에 떴다. 12세 때 자전거를 타다 무릎을 다친 기록, 18세 때 농구 시합을 하다 팔을 다쳐 치료받은 기록도 있었다. 그는 "모든 시민이 15세 때 포털 ID를 받아 국민 건강 일기장 역할을 한다"며 "열람 기록이 남아 부적절한 이용은 방지된다"고 했다.

이는 국민 동의가 있어 가능했다. 덴마크 공공 의료 홍보 기관인 헬스케어 덴마크의 한스 에릭 CEO는 "의료 정보는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윤리위원회 승인을 받는 등 활용 전에 국민적인 동의 절차가 진행됐다"고 했다.

의료 정보를 혁신에 활용하는 덴마크를 보며 한국의 논쟁이 떠올랐다. 우리는 개인 정보 유출 가능성과 법·제도 미비 등의 문제로 이미 확보한 6조 건의 의료 데이터도 활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규제나 개인 정보가 먼저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진화한 AI, 의사의 훌륭한 조력자 될거라 확신

의대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통계와 자료 분석을 좋아했습니다. 어떤 의사가 돼야 할까를 고민하다 인공지능(AI)을 다루는 의사를 꿈꾸게 됐습니다. 덴마크를 찾은 이유도 그들이 준비하는 의학의 미래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제약회사 리오 파마의 존 지버트(오른쪽) 팀장이 이수영 탐험대원 팔 사진을 찍어 피부 질환을 알려주는 휴대전화 앱에 올리는 모습. 사진을 올리면 특정 피부 질환과의 일치율을 알려준다.

코펜하겐에서 정부 관계자, 기업인, 엔지니어, 유전자학과 인류학 교수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핵심은 같았습니다. AI는 의사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환자가 더 빠르고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용한다면 AI는 의사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조수가 되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제 꿈도 확실해졌습니다. AI 기술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발전을 이끄는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