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칠레 정부가 재정 적자 축소를 위해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을 30페소(약 50원) 인상키로 하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공공기관·상점 등에 방화하는 등 폭동으로 비화되자 29년 만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에콰도르에서도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7명이 숨졌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우파 성향의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중남미의 동시다발적 소요는 과잉 복지를 축소하려는 노력에 대한 대중(大衆)의 반발이란 점에서 뿌리가 같다. 빈부 격차, 사회 모순에 오랜 포퓰리즘이 겹쳐지면서 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이 회복 불능으로 훼손됐다. 칠레는 지난해 출범한 우파 정권이 누적된 재정 적자를 줄이려 긴축과 민영화를 추진하자 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에콰도르 정부도 유류 보조금을 삭감하고 세제·노동제도를 손보는 개혁 조치를 추진하려다 저항에 부닥쳤다. 중남미 국민은 2000년대 원자재 가격 상승기에 집권했던 좌파 정부의 선심성 복지 정책에 익숙해져 있다. 원자재 값 급락으로 재정 기반이 무너지면서 각국이 긴축에 나서자 복지와 보조금 혜택을 당연시하는 대중이 저항하며 정치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번 뿌려진 과잉 복지를 회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이후 좌파 정권이 주로 집권하면서 매년 두 자릿수 임금 인상과 후한 연금제도, 무상 의료 같은 복지 포퓰리즘 정책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공무원 수를 국민 11명당 1명꼴로 늘려 놓았고, 온갖 보조금과 현금 복지를 남발하면서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다. 국가 부도 위기 속에서 2015년 출범한 우파 정부가 재정 개혁에 나섰지만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져 정권을 흔들고 있다. 결국 이달 말 선거를 앞둔 우파 대통령이 개혁 조치 대부분을 철회했다. 복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금 살포 정책들이 중남미형 복지 포퓰리즘의 초입과 비슷하다. 정부가 최대 고용주가 되어 공무원을 늘리고 세금을 동원해 지속 불가능한 눈속임 가짜 일자리를 대량 생산해내고 있다. 아동수당·기초연금 확대와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무상 의료, 무상교육처럼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지출되는 보편적 복지가 과속으로 부풀고 있다. 각 지자체는 농민수당이니 청년·구직수당 등의 이름이 붙은 현금 살포 복지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일단 지급되면 늘어날 수는 있어도 줄어들 수는 없다. 중남미가 보여주고 있다.

이미 정부 재정엔 경고등이 켜졌다. 내년 재정수지 적자는 건전 재정의 기준점으로 간주되는 GDP 대비 3% 선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도 내후년쯤엔 저지선으로 여겨졌던 40% 선을 넘어설 전망이다. 노동·규제 개혁 같은 근본적 경제 활성화 대책이 수반되지 않는 재정 지출 일변도 정책은 큰 후유증을 낳을 수밖에 없다. IMF 등 국제기구들도 재정 건전성이 중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시정연설에서 정책 전환은 언급조차 않은 채 "재정 확장은 선택 아닌 필수"라고 세금 살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병이 나으려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대중은 써서 안 먹겠다고 한다. 어떤 정치인은 '그래도 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국민을 설득한다. 하지만 다른 정치인은 대중에 영합하면서 선거에 이기는 방편으로 이용한다. 전자(前者)가 아니라 후자(後者)의 정권이 계속되면 나라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