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가운데에는 이순신이 있고 학자 가운데에는 정약용이 있다.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위인들이다. 그런데 존경이 도를 넘으면 자만이 되고 자만이 지나치면 왜곡이 된다. 학자 정약용에 관해 세간에 사실인 양 떠도는 가짜 뉴스를 뒤집어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속에서 조상이 남긴 기록을 사수해낸 한 노인 이야기가 당시 신문에 소개됐다. 현대어로 해석한 내용은 이러하다.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는 책을 건지지 못하면 책과 함께 한강의 귀신이 되겠다며 결사의 행동을 취했다. 집채 같은 물이 머리 위를 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던 지난 18일 새벽 그는 아들과 함께 물을 헤치고 (집으로 들어가) 책을 구해냈다.'(1925년 8월 8일 '시대일보': 김보름, '여유당전서 간행 경위 일고찰, 2015, 재인용)

물이 넘쳐 사라져 버린 마을 이름은 '마재'다.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마현마을이다. 책을 들쳐 업고 살려낸 사람 이름은 다산 정약용의 현손 정규영이다. 그가 구해낸 책은 '정약용의 평생 포부를 적어놓은' '여유당집'이다. 집 뒤 다산 무덤까지 차오른 물에 자그마치 '오천삼백이십 권'은 떠내려가고 정규영은 여유당집 일백팔십삼 책만 건졌다. 이게 정약용의 사상체계가 21세기까지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다. 대한민국 사상계에 아찔했던 1925년 여름이었다.

대통령의 '목민심서' 자랑

2017년 11월 11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은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 축하 영상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가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 나라 대통령이 양국 교류의 상징으로 공식적으로 정약용과 호찌민을 언급했으니,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뿌듯한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은 호수로 변했지만 그 옛날 팔당호는 강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강변은 물바다가 됐다. 정약용이 살았던 남양주 마현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사라질 뻔한 그 저서를 후손이 건져내 사후 100년 만에 ‘여유당전서’로 부활시켰다. 마현에 가면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이 그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가짜 뉴스는 입 밖에 꺼내지 말 일이다.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설은 20세기 후반 어느 때부터 세상에 알려졌다. 베트남의 민족 영웅이자 국부인 호찌민(胡志明)이 다산을 흠모해 '목민심서'를 애독했고 그가 죽은 기일에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머리맡에는 항상 '목민심서'가 놓여 있었고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총을 겨누며 싸운 악연까지 있는 나라였으니, 민족 자긍심 고취에 한량없는 소식이었다. 2019년 10월 현재도 인터넷 포털에서 '목민심서'를 검색하면 십중팔구는 호찌민 애독서라고 나온다.

이제 '베트남 국부 호찌민의 정약용 숭배설'을 파헤쳐본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호찌민은 목민심서를 읽은 적이 없다.

호찌민 애독설의 시작과 유포

정약용의 대표작 ‘목민심서’.

1993년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만든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왔다. 전남 강진, 해남의 역사 문화 유적을 소개한 이 책에서 저자 유홍준은 이렇게 기록했다. '베트민(越盟)의 호찌민(胡志明)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이런 것을 그분 위대함의 보론으로 삼고 싶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p70)

이보다 1년 전인 1992년 소설가 황인경은 소설 '목민심서' 머리말에서 '호찌민은 일생 동안 머리맡에 목민심서를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했다.(최근식,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 여부와 인정설의 한계', 2010)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인 고은이 '경향신문'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나의 산하 나의 삶-혁명가의 죽음과 시인의 죽음'이다. '호찌민은 소년시대 극동의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구해 읽고 한동안 기일을 알아 추모하기를 잊지 않기도 했다.'(1994년 7월 17일 '경향신문' 9면)

'다산연구소'는 다산 정약용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단체다. 이 단체 홈페이지(www.edasan.org)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에는 이런 글이 게재돼 있다. '호찌민의 머리맡에는 바로 목민심서가 항상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산의 제삿날까지 알아내서 해마다 제사를 극진하게 모시기도 했다는 것이다.(하략)' 글을 쓴 사람은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이고 게재일은 2004년 7월 9일이다.

문제는, 이 지식인들이 주장한 호찌민의 정약용 존경설이 말 그대로 주장에 불과할 뿐, 전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박헌영이 목민심서를 줬다고?

2009년 나온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은 그 근거를 이렇게 대고 있다. '1929년 박헌영이 입학한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는 호찌민도 있었다. 박헌영은 그에게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이 책은 장차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평전', p106) 저자인 안재성은 '박헌영이 준 목민심서는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박헌영은 '친한 벗'이라는 뜻의 '朋友(붕우)'라는 서명을 해 선물했다'고 덧붙였다. 정말인가?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胡志明).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해낸 이 독립투사가 ‘목민심서’를 탐독하고 정약용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는 1990년대 일부 지식인의 근거 없는 주장으로 드러났다. 오른쪽은 을축년 홍수 때 유실됐다가 1986년 복원된 정약용 생가 안채.

1929년 호찌민은 정글에 있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했던 호찌민은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피압박공산대학에 다니며 활동한 뒤 중국을 거쳐 1928년부터 태국 방콕에서 본격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015, p18)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앞의 '박헌영 평전' 주장은 참고할 가치가 없다.

사후 100년 만에 나온 목민심서

1990년대 초부터 쏟아져 나온 ‘호찌민의 목민심서 애독설’. 위부터 ‘다산연구소’ 게시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1994년 시인 고은의 신문 기고문. 지금도 수정이나 취소가 되지 않고 있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시중에 목민심서 필사본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한 글자 반 구절도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선 안 된다"고 두려워했다.(정약용, '약암 이재의에게 보낸 편지') 1902년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의 저자)이 처음으로 목민심서를 출간했다. 그 전에는 지방 관청에서 저마다 만든 필사본밖에 없었다. 1936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에 즈음해 조선 지식인들이 여유당전서 출간을 결정했다. 이들은 1934~1938년 정약용 후손이 살려낸 문서들을 토대로 여유당전서를 발행했다.

그런저런 연유로 생전에는 단 한 권도 출간된 적 없던 책이었다. 두 차례 모두 정약용이 흘려 쓴 글을 활자로 옮긴 한문본이다. 목민심서는 분량 또한 48권 16책으로 방대하다. 아무리 한자권 지식인이라도 호찌민이 정글에서 들고 다니며 애독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박헌영을 만날 방법도 없었다. 호찌민은 정약용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었다.

고쳐지지 않는 허위 주장들

정리해보자. 1990년대 초 지식인 사회 어딘가에서 호찌민과 정약용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됐다. 이 위대한 이야기는 급속도로 사실로 굳었다.

그러다 2006년 1월 9일 '연합뉴스'가 '호찌민박물관과 집무실에는 목민심서가 없다'고 보도했다. "목민심서와 관련된 주장은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는 박물관장 응원 티 띵의 말도 함께 전했다. 현지에서 허위라고 증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실은 취소되지 않았다. '소설 목민심서' 머리말에서는 이 같은 내용은 빠졌다. 그러나 고은 시집 '만인보'에는 똑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도 여전히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 목민심서는 2019년 현재 '600만 권 판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은 '230만 독자를 감동시킨 답사기'로 홍보 중이다.(최근식, 앞 논문)

생가 뒤쪽 언덕에 있는 정약용 무덤. 을축년 홍수 때는 이 무덤까지 물이 들어찼다.

지난 4월 24일 다산연구소 게시판에 한 베트남 한인매체가 이 문제에 관해 질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연구소 측은 '근거가 전무하며 확인된 바가 없다'고 답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애독했고, 제사도 지냈다'는 글은 10월 21일 현재까지 남아 있다. 저명한 전문가들이 호찌민과 정약용의 인연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대중은 사실로 믿고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워한다.

정약용이 태어난 남양주시는 2005년 11월 15일 베트남 빈시(市)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빈시는 호찌민의 고향이다. 2017년 3월 남양주시는 빈시에 10억원을 들여 도로를 개통했다. 도로 이름은 '남양주다산로'다. 그리고 8개월 뒤 대한민국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에게 "당신네 국부가 우리 학자의 책을 애독했다"고 교류를 역설했다. 이 헛돼버린 국민 자긍심과 지자체의 헛된 노력과 대통령의 헛된 외교 언사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역사는 누가.

다음 주는 '이순신의 세계 4대 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