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 1950) 선생은 일제에 비폭력, 불복종으로 저항해서 '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18일 오후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조만식 선생의 순국 69주기 추모식. 우윤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개회사에서 고당 선생에 대해 말했다. 우 이사장은 "오늘날 한국의 번영도 고당 같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18일 열린 조만식 선생 순국 69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일제 치하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물산장려운동으로 민족 경제를 진흥하기 위해 애썼던 조만식 선생의 추모식이 이날 열렸다.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송삼용 하늘양식교회 목사, 조연흥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 박성범 전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18일은 조만식 선생이 별세한 날이다. 참석자들은 추모사와 강연을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면서 조만식 선생의 사진을 향해 묵례했다.

권용우 단국대 명예교수는 추모 강연 '고당의 삶과 애국애족의 길'에서 조만식 선생의 정신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교육 구국(救國)'의 정신으로 헌신했던 실천적 교육자였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한 선각자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월남하지 않고 순국의 길을 택한 민족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고당은 일제강점기에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부임한 이후에도 교장이자 교사, 사감이자 사환이라는 '1인 4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참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조만식 선생은 1919년 평양 독립 만세 운동의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다 10개월 옥고를 치렀다.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운동을 이끌었고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며 민족 언론 창달에 앞장섰다. 광복 후에는 평양에 남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공산 정권에 의해 연금됐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18일 별세했다.

오진영 청장은 추모사에서 "조만식 선생은 광복 이후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땅에서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불의에 항거하는 한편, 어렵게 되찾은 조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