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의 작은 마을 부세토는 오페라 애호가들의 성지다. 7000명이 사는 이 마을엔 작지만 번듯한 오페라극장까지 있다. 부세토가 배출한 거장(巨匠) 주세페 베르디(1813~1901)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유지들이 돈을 내 세운 극장이다. 베르디 이름을 따 1868년 개관한 300석짜리 이 극장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하고,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노래하면서 전설이 켜켜이 쌓였다. 극장 앞 광장엔 수염 덥수룩한 장년의 베르디 동상이 장인이자 후원자였던 바레치의 집을 응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부세토 극장서 올린 ‘아이다’에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로 나선 테너 이범주. 풍성한 음량과 강렬한 연기로 베르디 본고장에서 호평받았다.

베르디 극장은 매년 9~10월 파르마 왕립극장과 함께 베르디 페스티벌을 연다. 이 극장이 올 페스티벌(9월 26일~10월 20일)을 위해 고른 작품은 '아이다'. 테너 이범주(34)와 베이스 김동호(32)가 나란히 주역으로 캐스팅됐다. 150년 역사의 이 극장에서 한국 성악가 둘이 '아이다'를 부른 건 처음이다. '아이다'는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와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 포로로 끌려온 에티오피아 공주 아이다의 사랑과 분노를 원숙한 선율에 담아낸 베르디의 대표작이다.

지난 6일 베르디 극장에 오른 이범주와 김동호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집트 대제사장 람피스 역 김동호가 먼저 나섰다. 에티오피아의 침략에 맞설 사령관을 신탁으로 정하기로 했다며 안정감 있는 저음으로 무게를 더했다. 이어 '청아한 아이다'가 울려 퍼졌다. 이범주는 데뷔 무대답지 않게 능숙했다. 두 팔을 벌리고 객석 위쪽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브라보' 함성이 터져 나왔다. 3시간 반 넘는 공연 내내 둘은 극을 이끄는 중심축이었다. 두 사람은 '아이다' 10회 중 절반을 책임진다.

람피스로 출연한 베이스 김동호(위). 아래는 베르디 동상 오른쪽에 부세토 베르디 극장이 보인다.

호주 소프라노 나탈리 아로얀은 풍성한 음색이 매력적인 아이다였다.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량을 마음껏 드러냈다. 지휘자 미켈란젤로 마차는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을 솜씨 좋게 이끌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이름난 프랑코 제피렐리가 디자인한 무대와 연출은 스케일 큰 '아이다'를 소극장에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보기 좋게 날렸다.

단국대 성악과를 나온 이범주는 원래 바리톤이었다. 4년간 독일 유학을 했지만 콩쿠르는 물론 오페라 아카데미 시험까지 모조리 떨어졌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테너 아리아 몇 곡을 연습해 밀라노로 옮겼다. 레슨을 해준 선생님들은 "넌 테너 목소리야. 테너!"라고 입을 모았다. 테너로 음역을 바꾼 뒤 콩쿠르에서 하나둘 입상하며 자신감이 붙었다.

3년 전부터 파르마 왕립극장에서 대타(代打)로 뛰었지만 본무대는 한 번도 못 섰다. 올해 기회가 한꺼번에 왔다. 지난 4일 파르마 왕립극장에서 열린 베르디 콘서트에서도 피날레의 주역이었다. 로베르토 아바도가 지휘하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교향악단과 함께 베르디가 1862년 런던박람회를 위해 쓴 '국가들의 찬가' 솔로를 불렀다. 이탈리아 관객에겐 국민 음악이나 다름없는 이 곡을 베르디 페스티벌에서 한국 테너가 당당하게 소화한 것이다.'아이다'에서 만난 네덜란드 관객들은 "그제 밤 이범주를 눈여겨봤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베르디 페스티벌은 2001년 파르마 왕립극장 주도로 시작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오페라 축제다. 올해는 '아이다' '나부코' '루이자 밀러'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 등 베르디 오페라 4편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