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지 경제부 기자

지난달 24일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인천 강화까지 번지자 이낙연 국무총리는 방역 실패를 인정하며 관계 부처에 '매뉴얼을 뛰어넘는 방역'을 주문했다. 이에 강화군은 지역 내 사육 돼지 전량 살처분이라는 특단의 대책을 내놨고, 정부는 이달 들어 경기 김포·파주·연천에서 기르는 돼지까지 몽땅 없애기로 했다. 이어 방역 당국은 지난 13일 발표한 보도 자료에서 "정부는 ASF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신속하게 SOP(긴급행동지침)를 뛰어넘는 과감한 조치를 시행했다"고 자평했다. 지금까지 땅에 묻힌 사육 돼지만 15만 마리가 넘으니 '과감하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유독 '야생 멧돼지'에 대해선 정부의 과감한 조치가 보이지 않았다. 국내 발병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북한 야생 멧돼지에 의한 전파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북한 비무장지대(DMZ)에 방치된 멧돼지 사체에 접촉한 쥐나 새 등을 통해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ASF 방역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멧돼지는 환경부 소관"이라며 책임을 미뤘고, 환경부는 "멧돼지가 전염시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선을 그었다. DMZ를 관리하는 국방부도 "올해 남한으로 넘어온 북한 멧돼지는 없다"고 거들었다. 정경두 국방장관까지 나서 "물리적으로 멧돼지가 내려올 수 없다"고 하니 멧돼지는 ASF 감염원에서 점차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 장관 발언 다음 날인 지난 3일 DMZ 내에서 발견된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확인됐다. 그래도 정부의 대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DMZ 이남으로는 감염 멧돼지가 내려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부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지난 11~12일엔 DMZ 이남에서 ASF에 감염된 멧돼지 폐사체 4마리가 발견됐다. 그제야 정부는 야생 멧돼지를 적극 포획하겠다는 긴급 대책을 내놨다. ASF가 국내에 발병한 지 26일 만이었다.

다른 유력한 ASF 감염 경로로 꼽히는 '잔반 급여'나 '불법 축산물 반입' 역시 가능성이 높지 않다. 국내 ASF 발병 농장 중 잔반을 급여한 곳은 돼지 18마리를 키우던 미등록 농장 한 곳뿐이었고, 농장 근로자가 해외에 다녀온 농장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가 멧돼지에 의한 전파 가능성만 극구 부인하는 배경에는 '북한'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멧돼지를 ASF 숙주로 지목하는 것은 북한 유입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남북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정부는 "야생 멧돼지가 사육 돼지를 감염시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멧돼지가 철책을 넘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멧돼지가 ASF 유입 경로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제대로 된 방역을 위해 정부는 매뉴얼 이전에 북한부터 뛰어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