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조사 ‘에’는 생김새는 허름하지만 그 쓰임새는 넓고 깊다. ‘에’는 연금술사의 램프와 같아서 분석되거나 설명되지 않지만, 단어들의 경계를 허물고 굳어버린 개념을 축축하게 적셔서 넓은 자유의 공간을 열어낸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라고 신라의 풍류 남아 처용이 노래할 때 이 '에'는 노는 인간과 달을 직접 매개한다. '에'는 달과 인간 사이를 놀이의 신명으로 가득 채워서 달과 인간은 놀이의 짝이다. 달이 놀이판으로 들어와서 달도 놀고 인간도 논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고려의 유랑민이 노래했을 때, 이 '에'는 청산과 인간을 서로 스미게 한다. '청산에'는 '산속' 또는 '산 가까이'처럼 산과 인간의 물리적 근접을 말한다기보다는 외로움, 소외, 억압 같은 청산의 모든 괴로움을 능동적으로 감당하려는 인간의 내면을 토로한다. '에'는 '청산'에 붙어서 청산을 인간의 실존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이라고 서정주가 노래할 때 이 '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을 '누님'의 생애 속에 육화시켜서 언어를 삶으로 전환하는 연금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는 논리적 구조를 구문 안에 돌출시키지 않고 조용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박목월이 노래할 때 '에'는 구름과 달을 동시에 가게 한다.

소설가 김훈

구름이 가고 또 달이 가고 나그네가 가므로, 이 '에'는 누가 누구를 이끌고 가는지 밀고 가는지를 구분하지 않고, 구름 달 나그네를 함께 가게 한다. '에'가 빚어내는 자유의 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흘러간다.

"소나기에 들이 깨어났다" "바람에 꽃이 진다" "봄빛에 노인의 몸이 마른다"고 쓸 때 '에'는 인과관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논리와 정한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열어낸다.

한국어에서 '에'의 음역은 알토이다. 알토는 소프라노나 테너처럼 주선율을 이끌지도 않고 고음의 존재감을 내지르지도 않고 곡의 뼈대나 형식을 이루지 않는다. 알토는 고음과 저음 사이에 완충을 만들어서 부딪치지 않게 하고 음악 전체를 새로운 질감으로 전환한다. 알토의 스밈은 자신의 음역에 갇히지 않고 곡 전체에 미친다.

한국어 '에'는 주어나 술어로 쓰이지 못하고,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지 않고, 단 한 음절뿐인 그 성음은 낮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지만, 다른 단어들의 경직성을 풀어 헤쳐서 문장의 앞길을 열어주고 단어를 인간의 삶 속으로 밀어 넣는다.

‘두시언해’를 읽으면, 그 언해에 종사한 조선 초기 학자들이 ‘에’가 거느린 서늘한 그늘의 세계를 능숙히 활용해서 한문의 세계를 한글 구문 안으로 편안하게 끌어들인 솜씨를 알 수 있는데, 그 모든 용례를 분석해 보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