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과 강원 철원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걸린 야생 멧돼지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정부가 북한 접경지역 내의 멧돼지 총기 포획을 뒤늦게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ASF가 국내에 발병한 지 4주가 지나서야 정부가 총기 포획을 허용하면서 '방역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환경부, 국방부는 지난 11~12일 연천과 철원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내에서 발견된 야생 멧돼지 4마리에서 ASF 바이러스가 확인된 데 따라 긴급 대책을 추진한다고 13일 밝혔다. 지난 2일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ASF에 감염된 야생 멧돼지 사체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남방한계선 이남에서 ASF 감염 멧돼지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정부는 야생 멧돼지 폐사체가 나온 철원·연천 일부 지역을 '감염위험지역'으로 지정하고 30㎢ 이내는 '위험지역', 300㎢ 이내 지역은 '집중사냥지역'으로 구분해 관리하기로 했다. 감염위험지역 전체 테두리에 멧돼지 이동을 차단할 수 있는 철책을 설치하는 대로 집중사냥지역에서 총기를 사용한 포획을 시행할 방침이다. ASF가 발병한 5개 지역(김포·파주·연천·강화·철원)과 인접 5개 시·군(고양·양주·포천·동두천·화천)은 발생·완충지역으로 총기 포획은 금지하되 포획틀과 포획트랩 수를 늘리기로 했다. 남양주·가평·춘천·양구·인제·고성·의정부는 경계지역으로 설정해 멧돼지 전면 제거를 목표로 14일부터 집중 포획을 실시한다.

지난달 17일 ASF가 국내에서 처음 발병한 뒤 환경부와 국방부, 농식품부 등 정부 관련 부처는 일관성 없는 '오락가락 대응'으로 사태를 키워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달 17일 ASF가 국내에 처음 발병한 뒤 지난 10일까지 7차례나 '범정부 ASF 방역대책회의'를 소집해 관계 부처들에 철저한 방역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계 부처들은 멧돼지를 통한 ASF 유입 가능성을 낮게 판단하고, 정보 공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멧돼지 방역에 실패했다.

멧돼지는 환경부, 집돼지는 농식품부… 칸막이식 정부 대응

ASF 방역 정책 주무 부처는 농식품부이지만, 야생 멧돼지 방역은 야생동물 관리를 담당하는 환경부가 맡고 있다. 농식품부는 양돈 농가의 의견을 수용해 지난 5월부터 환경부에 개체 수를 1㎢당 3마리까지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환경부는 "의미 있는 수준의 멧돼지 개체 수 조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환경부는 그동안 "총기를 사용하면 멧돼지가 놀라 도망가 확산 우려가 있다"며 ASF 발생 지역 인근의 총기 사용도 금지해왔다. 그런데 지난 11~12일 야생멧돼지 4마리에서 ASF가 발생하자 부랴부랴 방향을 바꿔 총기 포획을 허용했다.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대책이다. 양돈업계에선 "지난 5월 북한에서 ASF가 발병한 이후 멧돼지 개체 수 조절을 그렇게 주장했는데 환경부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결국 이도저도 아닌 뒷북 대책이 나왔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처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선제적 대응에 실패한 것이다.

환경부는 첫 ASF 확진 다음 날인 지난달 18일 "한강을 거슬러 북한 멧돼지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낮다"고 발표했다. 환경부가 선제적으로 이 같은 입장을 내놓으면서 야생 멧돼지를 통한 감염 가능성은 크게 공론화되지 못했다. 국방부 역시 "현재까지 DMZ를 넘어온 멧돼지는 없다"며 야생 멧돼지에 의한 발병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부처 간 정보공유 안 돼, 컨트롤타워 부재

DMZ 내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나온 하루 뒤인 지난 3일에도 국방부와 환경부는 "남방 한계선 철책에는 과학화 경계 시스템이 구축돼 DMZ 내 멧돼지 등의 남측 이동이 차단돼 있다"며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멧돼지가 철책을 넘지 않더라도 DMZ 북한 구역에 방치된 감염 멧돼지 사체에 접촉한 쥐나 새 같은 다른 야생동물에 의해 ASF가 전파될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농식품부는 북한 전역에 ASF가 창궐했다는 정보를 지난달 24일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고 나서야 파악했다. 김재홍 서울대 교수는 "발생 초기 북한 발병 상황에 대한 정보 공유가 늦어지면서 사육 돼지에만 방역에 올인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주무 부처가 다르다 보니 ASF 발병 시 따라야 할 표준행동지침(SOP)마저 사육 돼지와 야생 멧돼지가 따로 작성돼 관리되고 있다. 환경부는 뒤늦게 집중 사냥 지역을 설정하고 총기 포획을 허용한 이유에 대해 "환경부 SOP에 따르면 야생 멧돼지에서 ASF가 발병한 경우에 집중 사냥 지역을 설정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국내 14곳 돼지 농장에서 ASF가 발생해 15만 마리 이상의 사육 돼지가 살처분 된 상황에서 환경부가 기계적으로 지침을 적용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한한돈협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연천 돼지 일괄 살처분에 강력히 반대하며, 야생 멧돼지 방역 업무를 환경부에서 농식품부로 이관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멧돼지를 보호하는 환경 부서가 멧돼지를 살처분하는 강력한 정책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며 "멧돼지 ASF 방역관리 정책은 수의방역을 총괄하는 농식품부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