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본다. 북반구와 남반구가 서로 대표팀을 꾸려 스포츠 경기를 벌인다면 어떤 승부가 펼쳐질까. 대부분 사람은 이 대결 자체가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90%가 북반구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역대 동·하계 올림픽 메달 총합으로 순위를 내보면 10위 안에 든 남반구 국가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럭비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4년마다 열리는 럭비 월드컵은 세계적인 빅 이벤트다. 2015년 잉글랜드 대회는 관중 수가 247만명, 시청자 수는 42억명에 달했다. 2019 일본 월드컵은 지난달 20일 막을 올려 다음 달 2일까지 펼쳐진다.

월드컵 우승 기록만 봐도 럭비는 '남반구 세상'이다. 뉴질랜드가 3회(1987·2011·2015), 호주(1991·1999)와 남아공(1995·2007)이 각각 2회씩 정상에 올랐다. 북반구 국가로선 잉글랜드가 2003년 유일하게 우승했다.

'남반구 대표'는 월드컵 3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올 블랙스(All Blacks· 상하의와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하는 뉴질랜드 대표팀 별칭)'다. 럭비가 곧 종교인 뉴질랜드 사람들은 월드컵에서 탈락하면 조기(弔旗)를 게양할 정도다. 인구 480만명 중 16만명이 선수로 등록돼 있다.

마오리족 전투춤 추는 뉴질랜드 럭비팀 - 발을 쿵쿵 구르며 가슴과 팔꿈치를 치고 혀를 내미는 마오리족 전투 춤 '하카(Haka)'는 뉴질랜드 럭비의 트레이드 마크다. 지난 6일 일본 도쿄 스타디움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조별리그 뉴질랜드—나미비아전에 앞서 뉴질랜드 선수들(위)이 하카를 추는 모습.

라이벌은 남반구 이웃 호주. '왈라비스(Wallabies·캥거루과 동물로 호주 팀 별칭)'와 '올 블랙스'의 맞대결은 최고 빅카드다. 지난 월드컵 결승 땐 양국 대표 항공사인 콴타스(호주)와 에어 뉴질랜드가 내기를 했는데, 호주가 패하며 콴타스 승무원들이 '올 블랙스' 유니폼을 입고 비행기에 올랐다.

'스프링복스(Springboks·영양)' 남아공도 세계적인 강호다. 1995년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선 흑인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백인 주장에게 우승 트로피를 전달하며 역사적인 흑·백 통합의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대항하는 북반구엔 '종가' 잉글랜드와 현 세계 랭킹 2위 웨일스, 월드컵 준우승 3회의 프랑스 등이 있다. 이번 월드컵에선 홈 팀 일본이 조별리그 3연승을 달리며 열도를 열광에 빠뜨렸다.

일본은 3년 이상 거주하면 해당 국가대표로 뛸 수 있는 조항에 따라 뉴질랜드 출신 주장을 포함해 남아공·호주·통가 등 럭비 강국 태생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한국인 구지원도 활약 중이다. 122㎏으로 일본 팀에서 가장 무거운 그는 스크럼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격렬한 럭비의 바탕엔 '신사도(紳士道)'가 흐른다. 처절할 정도로 몸과 몸이 부딪치지만 서로를 존중해 선수끼리 시비가 붙는 일은 적다. 경기가 끝나면 심판은 '노 사이드(No side)'를 선언한다. 이 말엔 선수들은 결국 어느 편도 아닌 하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요즘 한국 현실에선 참 듣기 어려운 말이라 더 가치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