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김영선 옮김|돌베개
208쪽|1만3000원

일본계 미국인으로 1998년도 퓰리처상을 받은 저명한 문화비평가이기도 한 저자는 워싱턴포스트와 타임을 거쳐 1983년부터 2017년까지 34년간 뉴욕타임스에서 서평을 담당해 왔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 정치 평론집에서 저자는 "미국 사회가 곤경에 처했다"고 진단하며 그 이유로 '진실의 사망(The Death of Truth)'을 꼽는다. '트럼프 시대의 거짓말에 대한 고찰'이란 원서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트럼프 대통령을 그 배후로 지목한다. 서평가이자 비평가답게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다양한 인문서들을 소개한다.

트럼프가 하루 평균 5.9번 거짓말을 하고, 그가 틈만 나면 언론을 비난하며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가짜뉴스 트윗 등을 날린다는 사실은 외신을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다. 한국 독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가짜뉴스와 거짓말 시대에 대한 저자의 인문학적 고찰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문제들이 지금 한국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저자는 현대를 '객관보다 주관이, 지식보다 의견이, 사실보다 느낌이 찬양받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는 나치 독일과 소련을 인류 역사상 가장 소름끼치는 두 정권으로 지목하면서, 두 정권이 지닌 통치법도 거짓말과 가짜 약속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는 유권자의 책임이 크다.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보다 감성에 기대는 태도 등이 잘못된 정권과 지도자의 탄생을 부른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방관적 태도는 '진실의 쇠퇴'를 초래하는데, 문제는 진실과 이성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성적 논의가 실종된 자리를 두려움과 분노가 차지하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휴대전화로 가짜뉴스를 퍼뜨린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사진은 ‘가짜뉴스’라는 영문 글자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하는 장면을 휴대전화와 합성한 것.

저자는 미국 사회의 지적 풍토도 진실을 허무는 데 가세했다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를 공범으로 지목한다. 객관적 실재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관점이 진리를 대체하며, 객관성보다 주관성을 옹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가 정치와 만나면서 진실의 사망이 가속화됐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 반대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남부연합 동상 철거에 반대하는 신나치주의자를 동등하게 취급하며 양측 모두를 향해 "일부는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야말로 진실이 실종된 미국 사회의 병적 단면이라고 비판한다.

이 위기에서 미국을 구할 주체는 결국 시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톰 니컬스의 저서 '전문가와 강적들'을 인용하면서 "시민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이해하는 기본 문해력을 습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지한 선동 정치가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거나 권위주의 체제로 쇠퇴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사회가 겹쳐 읽힌다. '사람들은 무엇이 사실인지보다 무엇을 사실이라 믿는 게 편리한지에 더 관심을 둔다'는 진단은 조국 사태에서 진영에 의해 팩트를 취사선택하는 한국 사회를 두고 하는 지적 같다. 전문가와 전문지식을 경시하는 풍토, 사실보다 흥미를 따르도록 디자인된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 등도 진실의 죽음을 부르는 공범으로 꼽는다.

당파성이 진실을 지운다는 비판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부분 트럼프를 지지하며 결집해 그의 거짓말, 전문성 무시,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이념에 대한 경멸을 합리화했다"거나, "트럼프 조력자들에게는 당파가 도덕성, 국가 안보, 재정 책임, 상식, 예의 등 모든 것을 능가했다"는 저자의 지적을 대한민국 정치판에 대입해도 하나도 틀릴 게 없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는 책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진실이 있다는 저자의 전제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뿐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위기는 대부분 부실한 사실(fact)에서 비롯된 것이지 진실(truth)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명백한 진실이 있다는 견해야말로 다른 주장이 들어설 자리를 막아버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