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인간은 생로병사 하는 존재다. 대부분 동물에게는 생(生)과 사(死)가 바로 이어지지만, 인간에게는 아프며 나이 드는 과정이 유난히 길고 험하다. 병치레하며 늙어가는 기간은 최근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인류가 초유의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사회에 대비하느라 나라별로 분주한 가운데, 작년에 초고령자가 총인구의 28%를 넘기며 세계에서 제일 늙은 나라가 된 일본은 그중 가장 다급한 모습이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 고령화 정책은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이다. 수십 년에 걸친 논의 끝에 2014년에 제정된 관련 법률은 고령자가 혼자 살더라도 30분 이내 거리에서 각종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노인들이 평소 살던 집과 동네에서 의료와 복지 혜택을 받는 데 있다. 고령자들이 병원이나 양로·요양 시설 대신 거주지와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노인 복지 정책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AIP(Aging in Place)라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지역사회 계속 거주' 정도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연령·소득·역량 수준과 상관없이 안전하고 독립적이고 편안하게 자신의 집과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 AIP는 일본뿐 아니라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복지 선진국들이 앞다퉈 도입하고 있는 신개념 노인 돌봄 체계다. 원칙은 고령자들에 대한 격리가 아닌 포용이다. 따라서 치매 환자들까지 생산인구의 일부로 편입하는가 하면 익숙한 생활환경의 보존을 위해 재건축이나 도시 재생도 절제한다.

물론 우리가 AIP를 먼 산 보듯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노인·장애인·정신 질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 정책을 확정하고, 지난 6월부터 전국 8개 기초자치단체에서 선도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가 특히 '혁신적'이라며 강조하는 부분은 그것이 중앙정부의 일방적 내지 일률적 복지제도가 아니라 지자체의 자발적이고도 창의적인 복지 설계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책의 성공 또한 따 놓은 당상일까?

생로병사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AIP에 담긴 복지 서비스의 탈(脫)시설 기조는 현행 시설 위주의 복지제도에 대한 역사적 반동(反動)이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 문명은 이른바 '비정상인'을 통제 시설에 격리하는 '대감금의 시대'를 열었다. 시작은 광인(狂人)이었지만 기형인, 부랑자, 걸인을 거쳐 점차 빈민이나 실업자들까지 범주가 커졌다. 이성적 통치의 관점에서 이들은 사회적 가치의 창출 능력을 결여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냥 방치할 경우 사회적 불안과 위험이 명확했기에 복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복지 정책은 불필요해 보이는 '주변인' 혹은 여분인 듯한 '잉여 인간'들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다. 또한 근대적 가족제도의 확산과 더불어 고령자들도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어 복지 서비스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복지 정책이 격리 및 시설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한편으로는 대감금 시대의 유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가시성과 경제적 가성비 때문이었다. 물론 그 나름의 순기능은 있었다. 하지만 최근 AIP 개념의 득세에서 보듯 역기능에 대한 비판도 그동안 많이 쌓였다.

유럽도 그랬지만 특히 우리의 전통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결코 그렇게 돌보지 않았다. 소설 '아가(雅歌)'에서 이문열은 "예전에 그들은 우리 곁에 있었고 우리와 함께 세상을 이루었다"고 회고한다. 구호 대상자, 정신병자, 심신 미약자, 장애인, 지체 부자유자들은 수용소나 재활원, 보호소가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부락 공동체의 일부로 동고동락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마땅한 의무로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일반 노인들까지도 시설에서 늙고 죽는 것이 우리 주변의 일상이 되었다.

불과 몇 년 뒤의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담당 부처나 전문가들이 지역사회 통합 돌봄에 착안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선진 사례의 재빠른 벤치마킹이 능사는 아니다. 무너진 생활 공동체, 형식적인 주민 참여, 무늬만 지방자치 등 선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판 AIP에 국가주의적 복지 강박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사뭇 염려스럽다. '시범 사업-체계 구축-종합 관리'라는 일사천리식 목표부터 그렇다. '노인을 위한 나라'로 가는 길은 서둘되 함께 가야 한다. 국가와 지역과 사회와 시장과 동네와 시설과 가족과 개인이 나란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