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경북 구미시 코오롱 인더스트리 공장에서는 노란 실뭉치를 풀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5G 광섬유케이블, 항공 타이어에 쓰이는 아라미드 섬유다. 직원들은 아라미드 뭉치를 풀어 검사용 샘플을 채취했다. 출고될 아라미드의 탄성을 점검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아라미드는 지난해 코오롱 인더스트리 구미공장 매출의 20%인 1253억원을 차지한 효자 상품이다. 아라미드는 개발에 30년이 걸렸다. 김성중 공장장은 "초기에는 돈 낭비, 시간 낭비라며 소재 개발을 그만두자는 얘기가 많았다"며 "고부가가치 소재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 결국 옳았다"고 했다.

코오롱은 지난 16일로 조성 50주년을 맞은 구미국가산업단지(옛 구미공업단지)의 최초 입주 기업 중 하나다. 구미산단은 코오롱과 KEC를 두 기둥으로 출범했다. 두 기업은 지금도 구미산단을 지키고 있다. 지난달 22일 KEC 구미공장에서는 반도체 칩을 제조 중이었다. 박경호 KEC 기획그룹장은 "50년 전엔 칩을 일본에서 수입한 뒤 패키지에 붙이는 작업만을 했지만 지금은 우리 기술로 칩을 만든다"고 했다.

폴리에스터 섬유 만들다 이젠 ‘수퍼섬유’ 생산 - 1974년 경북 구미공업단지(현 구미국가산업단지) 코오롱인더스트리 공장에서 직원들이 폴리에스터 섬유를 출고 직전 최종 점검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지난 16일 같은 공장에서 이 회사 직원들이 ‘수퍼 섬유’로 불리는 아라미드의 품질을 점검하는 모습.

수십 년을 소재 개발에 투자하고, 국내 기술을 개발해 시장을 개척하는 두 기업은 지난 50년간 구미산단을 지켜온 혁신 정신을 보여준다. 산단 50주년을 맞는 구미 시민들은 "구미산단은 구미시의 탯줄이자 동아줄"이라면서 "산단이 살아야 구미가 산다"고 말했다. 시민 김민철(43)씨는 "시민 모두 한마음으로 뭉친 지금이 산단 부활의 적기"라고 했다.

구미산단은 1969년 9월 16일 '구미공업단지 조성 실시계획'이 인가되면서 움텄다. 국내 최초의 전자공업 전문 단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미는 공업 용수가 풍부하고 경부선 철도가 있는 데다 노동력이 풍부해 전자공업을 육성하기 좋다"며 구미공단 설치를 결정했다. 공단 부지는 당시만 해도 곳곳이 논밭이고 공동묘지였다. 박 전 대통령은 농사밖에 몰랐던 구미읍민들에게 "우리도 전자공업을 일으켜 잘살아보자"고 했다. 이 말은 읍 주민들이 뭉친 구미공단추진위원회의 구호가 됐다.

구미산단이 불황에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수출액과 고용 규모 등이 정점이던 1990년대에 비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 최고 수준을 지키고 있는 분야도 있다. 지난해 국내 전기전자 업종 생산·수출액에서 각각 1조5745억원, 16억6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국내 5대 산단 중 1위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중화학공업 기획을 맡은 김광모(86) 당시 대통령 비서실 경제2수석실비서관은 본지 인터뷰에서 "구미산단의 전자공업은 한국 중화학공업의 기반"이라며 "글로벌 기업인 삼성과 LG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근원도 구미에 있다"고 말했다.

구미산단은 2000년대 들어 LG와 삼성이 잇따라 수도권으로 떠나며 위기를 맞았다. 입주 기업 중 80%가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허용석(49) 구미전자정보기술원 구미정책연구소장은 "최근 8년은 구미산단에 부족했던 중소기업 협업을 다지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수십 년간 대기업 납품 경쟁을 해온 동종 기업을 한데 모아 협력 관계로 묶고 연구소·대학 캠퍼스 이전 등 연구개발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산단 관계자들은 대기업이 없더라도 경쟁력을 발휘할 새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사홍 한국산업단지공단 기업성장지원단 위원은 "연구·제조 업체가 밀집된 중소기업 단지는 구미산단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면서 "구미산단은 세상에 없던 부품을 의뢰해도 가장 빠르게 만들어내는 산단으로 기업가들에게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장점을 찾아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청년 기업가들도 구미로 모여들고 있다. 구미2산단에서 3D 프린터 제작 기업인 '나인랩스'를 운영하는 박성호(39) 대표는 서울·경기·울산 등 여러 산단을 돌아본 뒤 구미산단을 선택했다. 그가 이끄는 나인랩스는 지난 2014년 1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0억원으로 급증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0일 구미산단을 스마트산업단지로 선정했다. 입주 기업 간 데이터와 자원을 연결해 생산성을 높이고 신산업을 창출하는 모델이다. 오는 2023년까지 총 4461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윤정목 한국산업단지공단 본부장은 "구미산단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면 앞으로 얼마든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구미시에서는 오는 22일까지 구미산단 50주년 기념 행사를 연다. 이원만 코오롱 초대 회장, 곽태석 KEC 초대 회장 등 구미산단을 빛낸 인물전, 구미산단 50주년 음악의 밤(18일), 구미산단 50주년 페스티벌(20일) 등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