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붉은색 코트에 선글라스를 걸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백악관을 나섰다〈작은 사진〉. 78세 '걸크러시' 펠로시의 기세등등한 걸음에 각종 소셜 미디어엔 '여성의 새로운 파워 슈트 등장'이란 글이 쇄도했고,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매체들마저도 "화끈한 할머니(feisty grandma)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주며 '쿨'한 이미지로 다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 당시 그녀가 선택했던 코트는 막스마라 제품. 2013년 단종된 상품이지만 쏟아지는 관심에 올 들어 재출시하게 됐다.

"패션을 통해 여성의 힘을 '체화(embodiment)'한 대표적인 경우죠. 중요한 건, 펠로시가 매우 강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우아하고 여성적이었다는 겁니다. 날 선 어깨에 남성미 돋는 건축적 디자인으로 강렬하게 다가온 게 아니라 부드러운 어깨선에 통이 넓게 감싸는 스타일이었어요. 여성은 여성(Woman, being a woman)일 때 가장 강해질 수 있다는 사회적 가치를 더해줬지요."

최근 서울 청담동 막스마라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위해 한국을 찾은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막스마라 창업자의 친손녀 마리아 줄리아 마라모티는 "막스마라의 한국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사람)인 배우 수현(클라우디아 김)이나 모델 아이린 김을 비롯해 수많은 소비자를 만나면서 전 세계에서 패션을 가장 잘 알고(fashion savvy), 도전적이면서도 대담하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내는 걸 확인했다"면서 "한국 여성들처럼 요즘 진정한 파워는 여성성, 다른 말로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2년 전부터 막스마라를 대표하는 얼굴인 '글로벌 앰배서더'에 북미 리테일 부사장으로 경영자 역할도 하면서 미국 여성영화인협회가 주최하는 '우먼 인 필름'을 공식 후원하는 등 전 세계를 다니며 여성의 힘을 강조해온 그녀다.

서울 청담동 막스마라 플래그십 스토어를 찾은 마라모티는 "트렌드에 휘둘리기보다는 테디베어 코트처럼 DNA를 지키면서 혁신해왔더니 브랜드 이미지가 훨씬 젊어졌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어깨에 '뽕'을 넣은 파워 슈트가 유행할 당시는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여성들의 고군분투가 의상에 반영된 것이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해요. '나'라는 그 자체의 인격체로 존중받는 것이 21세기용 패션 문법이라는 것이지요. 나도 오늘 입은 바지 정장이 편해서 매일 입고 다니는걸요."

의복의 기능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현상을 그녀는 코트를 통해 설명했다. 지난 1951년 아킬레 마라모티가 이탈리아 명품 여성복 브랜드로 탄생시킨 막스마라는 코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영혼을 가진 코트'라고 표현했던 캐멀(낙타털) 원단 코트는 막스마라의 상징이 됐다. 실크에 캐멀 헤어 퍼(fur)를 섞어 만든 볼륨 있는 테디베어 코트는 전 세계 품절될 정도로 인기다. "원래 군인들을 위한 외투에서 출발한 패션 아이템이지만, 여성들이 집에서 나와 일터로 향하면서 '몸에 입는 집' 역할을 한 것이지요. '패션 보호막'이 된 여성용 캐멀 코트를 처음 패션쇼 무대에 선보인 게 막스마라였습니다."

하루는 LA에서, 그다음 날은 밀라노로, 또 서울을 거쳐 싱가포르 등을 다니며 브랜드를 알리고 있다는 그는 "'이탈리아엔 1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2대가 번성시키고 3대가 흥청망청 말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이 법칙이 깨지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 잠도 쫓고 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요? K팝과 한국 드라마 실시간으로 보다 보면 그런 건 싹 잊어요. 중독될 지경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