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 현래장 손옛날짜장.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어 순화를 위해 억센 된소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언어학자들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짜장면은 중국 음식이고 따라서 중국어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짜장면은 더 이상 외국 음식이 아니었다. 100여 년 전 인천을 통해 들어온 짜장면은 미국의 밀가루 원조, 화교의 경제 활동과 함께 전국에 퍼졌다. 정부는 끊임없이 짜장면 가격에 손댔다.

그사이 짜장면은 변했다. 짠맛 위주인 중국과 달리 단맛이 가미됐다. 양파뿐만 아니라 감자, 당근 등 각종 채소가 들어갔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물을 붓고 전분을 탔다. 고기는 손톱만큼 잘라 흔적만 남겼다. 볶음이 아닌 소스 요리가 된 짜장면 역사는 한국 근대사의 배고픔과 가난으로 촘촘히 엮여 있다.

삼선, 해물, 쟁반 등 수식어를 붙인 '고급' 짜장면도 많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짜장면은 가장 싼 외식 음식이다. 졸업, 이사나 무료한 일요일 오후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자연스러운 이 음식은 그래서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두에게 특별한 기억이 있다.

서울 영등포 소방서 앞 '송죽장'은 1952년 문래동에 처음 문을 연 뒤 지금 위치로 가게를 옮긴 것이 1970년대였다. 지금도 식사 시간이면 긴 줄을 서는 이곳은 주문을 넣고 컵에 물을 따르는 사이 음식이 나온다고 해도 될 정도로 직원들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다. 보기만 해도 매운맛이 올라오는 짬뽕은 몸에서 땀을 저절로 뽑아낸다. 덕분에 인근 청과 시장 상인들과 백화점 직원들이 해장으로 자주 시켜 먹는다.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쟁반짜장은 테이블 위에 올라오자마자 하얗고 뜨거운 김이 난다. 주방에서 면과 짜장을 같이 볶아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면발이 입속에 들어오면 맵고 달고 짠맛이 튀지 않게 어울린다. 처음에는 '별것 없네' '맵지도 않네' 싶다가도 무의식 중에 젓가락이 가고, 다 먹을 즈음에는 땀을 흘리며 냉수를 찾는다. 70년 공력이 빚은 맛은 훈련병처럼 움직이는 그 집 직원들처럼 오차도 편차도 없다.

영등포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보라매역 부근 동작세무서 앞에 가면 '즉석우동짜장'이란 간판 하나 달고 영업하는 집이 있다. 2019년 지금도 짜장면 한 그릇에 3500원을 받는 이 집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면을 뽑는다. 디포리(밴댕이)와 멸치로 뽑은 육수에 쑥갓 올리고 김을 뿌려 먹는 우동은 후미진 골목에 불 하나 켜놓고 영업하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맛을 낸다. 감자를 툭툭 썰어 넣고 걸쭉하게 끓인 뒤 고춧가루를 쳐 먹는 짜장면을 고집하는 객도 꽤 된다. 싱긋싱긋 웃어대는 아이처럼 모나지 않고 몽글몽글한 맛과 식감을 지녔다.

마포에 가면 수타면 명가로 알려진 '현래장'이 있다. 불교빌딩 지하에 크게 펼친 이 집에 가면 제일 먼저 유리창 너머로 널찍한 주방이 보인다. 머리가 희끗한 요리사를 가운데 두고 요리사 여럿이 착착 합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 식당 규모와 절도가 느껴진다. 손으로 빚은 군만두도, 동글고 납작하게 고기 경단을 빚어 튀긴 뒤 볶아낸 난자완스도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다.

그리고 사람들은 짜장면을 시킨다. 씹는 맛과 탄력이 살아 있는 수타면이 힘을 모은 채 똬리를 틀고 감자와 양파를 툭툭 크게 썰어 올려낸 짜장면, 검은색이 아닌 갈색 윤기를 빛내며 소박한 단맛에 수더분한 짠맛을 품은 짜장면이다. 두툼한 면발을 이로 끊고 감자를 먹으며, 서걱거리는 양파를 씹으며 술술 한 그릇을 비운다.

저 나이 든 요리사가 오래전 까만 더벅머리를 한 채 철가방을 들던 시절을 떠올린다. 짜장면 값을 치르며 얇은 지갑을 오래 뒤지던 부모의 뒷모습도 그려진다. 모두 어렵던 때가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기뻐하고 감사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짜장면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