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년 전보다 0.04% 하락해 1965년 통계 작성 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물가'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농축수산물과 석유류 등의 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불황형 물가 하락'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우려를 피할 수 없다. 민간소비가 부진하고 기업투자가 위축되면서 제품·서비스 수요를 감소시키고 이것이 물가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 물가뿐 아니라 수출입 물가지수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국내총생산 물가(GDP 디플레이터)도 올 2분기 -0.7%를 기록, 3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경제 침체와 물가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악순환하는 '디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가 안정은 바람직하지만 경기 부진 때문에 벌어지는 물가 하락은 경제를 침체의 악순환에 빠트리는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업·개인이 물가 하락을 예상하고 지출을 늦추고 이것이 소비 감소와 재고 증가를 불러 투자·생산·고용 등 경제 전반이 동시에 가라앉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199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장기·복합불황을 겪었던 일본 사례가 디플레이션의 무서움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은행은 부인하지만 디플레이션을 예고하는 전조 증상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난 2~3년 사이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에 못 미치면서 저성장 구조가 굳어져 가고 있다. 올해 성장률은 1%대로 내려앉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설비투자는 올 1분기 마이너스 10.8%로 21년 만의 최악을 기록했고, 제조업 생산능력은 작년부터 하락세로 돌아서 올 7월엔 48년 만의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거시경제 지표 중 그나마 괜찮던 소비도 2개월 연속 감소세로 돌아섰다. 대형 할인점 이마트가 창립 26년 만에 첫 적자를 내는가 하면 급성장세를 보여온 온라인 유통 매출마저 10개월 만에 한 자릿수 증가율로 꺾였다. 재고율은 외환 위기 수준으로 올라갔다. 이 와중에 물가마저 하락세로 돌아섰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탈출법은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정책은 세금 푸는 것밖에 없다. 확장 재정이 필요하다 해도 근본 대책일 수 없다. 불확실성이 커진 기업들은 현금을 쌓아둔 채 눈치만 보고, 미래가 불안한 가계도 좀체 지갑을 열지 않으려 한다. 정책 대전환이 없으면 수십조원 적자 국채까지 발행해 세금을 퍼붓고 금리를 인하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