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한 프로 기사 42명, 그들의 단위를 합하면 무려 162단에 달한다. 프로 진출 경쟁에서 압도적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양천대일도장이 1일 출범 2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1999년 9월 1일 오픈 후 정확히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양천구 목동 오목교역 부근에 있는 양천대일은 아마추어 원장이 스파르타식 훈련 방식으로 이끌어온 도장으로 유명하다. 김희용(59) 원장과 첫 대면한 사람들은 그의 떡 벌어진 어깨와 우람한 팔뚝을 보고 격투기 사범으로 오해하곤 한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 복싱과 씨름 선수 생활을 했다.
이 도장 출신 기사들은 바둑보다 체력 훈련에 관련된 기억이 더 많다. "매주 4일 달리기를 했어요. 기본이 6㎞, 성적 부진 원생은 그 2배(12㎞)를 뛰었는데 처음엔 하늘이 노랬죠." 정두호(27) 3단의 회상이다. 배낭 메고 새벽 6시~밤 8시까지 구보 후 이튿날 5시간을 또 행군한 적도 있었다. 양천대일 출신 치고 허약한 기사가 없다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김동호(28) 6단은 당시 6㎞를 19분대에 주파, 육상 선수 전향을 고민할 정도로 소질을 보였다. 강한 체력이 정신력 강화로 이어지면서 2008년부터 입단자가 쏟아졌다. 김승재·강유택·안형준·한웅규·안성준·김정현 등에 이어 이동훈·신민준·안정기 등이 속속 프로가 됐다.
김 원장은 한때 원생들에게 체벌(體罰)도 불사했다. 물론 2010년 이전의 옛날이야기다. 성적 하락자 중 게으른 원생들의 손바닥과 발바닥이 타깃이었다. 한태희(26) 6단은 "가장 아픈 몽둥이를 몇 명이 몰래 숨겨놓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체벌을 받으면서도 진심이 느껴졌었고, 그런 경험이 훗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2007년부터는 입단·비입단 구별 없이 전원이 '졸업생'이란 이름으로 함께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졸업생 김채림(30)씨는 "다양한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도장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추억에 젖으며 정도 더 깊어진다"고 했다. 졸업생 회장 김성인(34)씨는 "원장님을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아무도 도장을 옮겨가지 않는 게 그땐 참 신기했다"며 웃었다.
현재 양천대일 원생들의 활약은 더 무시무시하다. 한국은 8월 초 세계청소년바둑대회 출전 사상 네 번째로 시니어·주니어를 석권했는데, 우승자 양유준(14)과 정준우(10)가 모두 이 도장 소속이다. 제19회 한화생명배 국수부에선 1, 2, 4위를 휩쓸었다. 14년 연속(2006~2019년) 입단자를 배출 중인 도장은 양천대일뿐이다.
30여명에 이르는 프로 지망생들은 이용수 8단과 이호범 6단이 지도한다. 다른 도장과의 차별점을 묻는 질문에 이용수 사범은 '원생에 대한 관심'을 꼽았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범을 맡아선 안 된다"는 게 이 도장의 철학이라고 했다. 그는 12년째 똑같은 임무를 수행 중이다.
식이 끝날 무렵 사회자가 김희용 원장과 '사모님' 이분옥(57)씨를 무대로 불러냈다. 캐리커처가 들어간 감사패를 전달받은 순간 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김 원장은 "지는 게 죽기보다 싫어 내 딴엔 참 열심히 살아왔다. 아마추어인 나를 믿고 따라와 준 모든 분께 감사한다"며 "이제부터 내 인생의 진짜 승부를 펼쳐볼 생각"이라고 했다. 최홍윤·안정기·이동휘·박재근 등 제자 프로 기사들이 일어나 호랑이 같던 스승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