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국내 정유업체 A사를 포함한 아시아 정유 업체 3곳에 '원유 할인 판매'라는 급제안이 접수됐다. 제안한 곳은 유니펙. 중국 국영석유회사 시노펙의 트레이딩(중개무역) 자회사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팔겠다고 제안한 기름이다. 모두 대서양과 인도양 바다 위 유조선에 실려 있는 상태였다. 제안 요지는 "유조선에 실려 중국으로 향하고 있는 미국산 원유 1000만 배럴을 싸게 팝니다"였다.

급매에 나온 원유 1000만 배럴은 8월에 미국 멕시코만 사우스텍스와 갤버스턴 등 석유수출항에서 아데체, 뉴멜로디, 뉴시저 등 초대형유조선(VLCC) 5척에 나뉘어 선적됐다. 이 배들의 당초 도착 예정지는 중국이다. 이들이 중국까지 실려오는 데 55일 정도가 걸린다. 문제는 그사이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중국 정부는 지난 23일 "미국산 원유에 9월 1일부터 5%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중국이 미국산 원유에 관세를 부과한 건 사상 최초다. 5% 관세를 맞으면 가격은 배럴당 3달러 정도 올라간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재 한국 정유사들이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 경유 등을 만들어 얻는 수익이 배럴당 4달러 수준"이라며 "한국보다 정제마진이 낮은 유니펙 입장에선 3달러 비용이 추가되면 이익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유니펙은 급매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원유 업계 관계자는 "정유사 폭발사고 같은 경우를 제외하곤 이처럼 유조선에 실린 기름을 팔겠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유니펙의 곤경은 미·중 무역분쟁이 글로벌 에너지 교역에 미치는 파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은 작년 7월까지만 해도 미국산 원유의 최대 수입국이었다. 하지만 작년 7월 미국과 중국이 상대방의 수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전쟁을 시작한 이후, 중국의 미국산 원유·석유제품 수입량은 5분의 1 수준 아래로 급감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냉·온탕을 오가는 사이 중국의 미국산 원유 수입도 요동쳤다. 지난 6월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당시 미·중 정상이 만나 협상을 통한 해결에 합의하자 유니펙은 다시 미국산 원유 대거 수입에 나섰다가 이번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이 막히면서 미국산 원유는 더 많이 한국과 일본 등에 쏟아져 들어올 전망이다. 미국은 셰일혁명으로 국내 원유 생산이 급증하자, 2015년 12월 40년 만에 원유 수출을 재개했다. 작년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고, 내년엔 67년 만에 에너지 수출량이 수입량보다 많은 순수출국이 될 전망이다. 시장조사기관 우드매킨지는 "중국의 관세 부과 조치로 미국 셰일원유 수출업자들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에 더 주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우리나라의 국가별 원유 수입량에서 미국산 원유는 7월을 기점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미국이 우리의 원유 공급국 2위에 오른 건 사상 최초다. 미국산 원유의 수입은 빠르게 늘고 있다. 작년 7월 537만 배럴이던 미국산 원유 수입량은 1년 사이에 3배 가까이 늘어난 1478만 배럴에 달했다.

미국산 원유 수입이 급증하는 건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미국산 원유(WTI)는 중동산 두바이유에 비해 배럴당 5달러 정도 싸다. 여기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따라 미국산 원유는 관세를 물지 않기 때문에 3% 관세가 붙는 중동산에 비해 더 저렴하다.

앞으로 미국산 원유 도입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유니펙의 원유 급매 사태는 미·중 무역전쟁의 파장이 얼마나 더 커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현재의 불확실성을 잘 보여준다"며 "우리 입장에서 미국산 원유 수입이 늘어나면 중동 산유국들과의 가격 협상력도 높일 수 있고, 미국과의 무역갈등도 예방할 수 있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