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문재인 정부가 마침내 동북아시아의 안보 구조를 재조정하려는 첫 단추를 끼웠다. 그 시작은 지난 2016년 일본과 맺었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파기지만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동북아의 지도를 바꾸고 끝내는 한·미 간 동맹 구조를 와해하는 데까지 갈 것으로 보인다. 한·일 지소미아 파기는 외형상으로는 일본과 군사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실질상으로는 한·미·일 3각 안보 체제에 더 이상 묶이지 않겠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과의 안보 협력 체제까지 재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안고 있다. 청와대 당국은 이 결정에 대해 “미국도 우리 입장을 이해했다”는 식으로 토를 달았지만 미국의 공식 반응은 실망과 불만을 넘어 대단히 격양된 것이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그러지 않아도 더 이상 우리와 '절친한 동맹'이 아니다. 사사건건 돈으로 따지는 '비즈니스 동맹'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우리가 필요해 안고 가야 할 처지인데 이런 식으로 '같은 편'끼리 서로 치고 빠지는 형국이라면 트럼프는 족히 한국에 미련을 남겨둘 위인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일 지소미아 파기는 내일의 한·미 동맹 와해까지 갈 위험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이 북한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문 대통령은 근자에 '평화 경제'라는 구상 아래 북한과의 경제 협력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다. 문 정부로서는 남북의 평화 경제를 내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군사 정보를 '염탐'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 이율배반적일 것이다. 그것도 일본과의 협력이라는 점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야당일 때 박근혜 정부가 맺은 이 한·일 지소미아에 극렬 반대했고, 집권한 뒤에도 미국의 적극적 후원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파기 명분(?)을 얻은 셈이다. 그리고 이제 친북 좌파의 '안보 카드'를 드러낼 시점을 찾은 것으로 봐야 한다. 청와대는 파기를 발표하면서 지소미아가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익'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국익은 문 정부가 총력을 경주해 행여 깨질세라 모시고 가는 대북 관계의 개선이며 지소미아는 여기에 부합은커녕 방해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세력 판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미·일 공조 체제에 균열이 생겨 한국이 거기서 이탈하는 모양새가 되면 동북아에는 70여 년 전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선언했던, 즉 동해를 경계선으로 한 대륙 봉쇄 라인이 새롭게 형성될지도 모른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그런 전략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인도까지 포함해 태평양~인도양에 걸친 대륙 봉쇄 전선을 구상하고 있지만 한국은 참여를 계속 뭉그적거려 왔다.

이번 문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는 한국을 한·미·일 3각 안보 체제서 이탈시켜 대륙 즉 북한과 중국 쪽으로 연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는 단순히 일본과의 군사 정보 협력 종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 북한과의 관계 더 나아가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쳐 동북아 세력 판도를 다시 그려야 하는 데까지 번져갈 소지를 안고 있다. 그것이 문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의도하고 펼치는 '그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은 어제의 밀도(密度)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며 미국의 정치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동맹 자체를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역량을 키우든지, 북한에 우리의 안보를 기대든지 아니면 미국 아닌 또 다른 강자에 붙든지 해서 명맥을 이어가야 할 처지다. 문 대통령의 그간 발언과 생각을 미루어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북한과 손잡고 경제를 일궈나가면 일본 아니라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순신의 ‘배 열두 척’만 언급했다. 이순신은 그냥 열세를 극복한 것이 아니다. 현지 조류와 기상을 이용한 지략과 전략, 그리고 ‘죽어서 사는’ 결단의 의지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