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색빌 정원에 있는 수학자 앨런 튜링의 동상. 오른손에 사과를 들고 있다.

'맨유의 산소 탱크'는 도무지 지지 않는다. 10여년 전 일이건만 여전히 한국 사람들에게 맨체스터란 도시는 박지성이란 고유명사부터 떠올리게 한다. 물론, 강도가 예전 같지는 않다. 박지성 시대에서 손흥민 시대로 바뀌었고, 올드 트래퍼드(맨유 홈구장)보다 북런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을 향하는 발길이 많아졌으니.

사실 맨체스터는 '축구 도시'로만 소비하기엔 아까운 도시다. '최초'라는 수식이 차고 넘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 세계 최초 여객 열차가 운행된 도시, 현대 컴퓨터가 잉태된 도시, 한 세기 전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된 곳…. 축구 떼고 과학·문화 도시 맨체스터를 봤다.

50파운드 새 얼굴, 앨런 튜링

여행의 시작은 빅토리아식 붉은 벽돌 건물에 둘러싸인 아담한 공원이었다. 맨체스터 시내 '게이 빌리지'에 있는 색빌 정원(Sackville Gardens). 연평균 강수일 140.4일인 이 습윤한 도시에 여름은 반가운 손님이다. 말간 해가 고개 내미는 날이 잦다. 7월의 어느 날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에 한 무리의 젊은이가 들어왔다. 워킹 투어에 나선 다국적 관광객이었다.

가이드가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노래를 튼다. 곱고 보드라운 영국 잔디 위로 밴드 '오아시스' 노래 'Don't Look Back in Anger(돈 룩 백 인 앵거)'의 선율이 포개졌다. 가이드의 목소리가 음악을 뚫고 나왔다. 벤치에 앉은 이방인은 슬쩍 귀동냥해본다. "오아시스도 맨큐니언(Mancunian·맨체스터 사람)이란 사실 알지요? 스톤 로지스가 이끈 매드체스터(Madchester·1980년대 후반 맨체스터에서 시작된 록 장르)도 있고요. 여기 앨런 튜링(1912~1954)도 이곳 맨체스터에서 세계 최초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맨체스터는 과학과 문화가 뒤섞인 도시랍니다."

가이드가 한 손에 사과를 든 채 벤치에 앉아 있는 동상을 가리켰다. 앨런 튜링.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천재 수학자다. 2차 대전 때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숨은 공신이자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불렸지만, 동성애로 체포돼 화학적 거세 형을 받다가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생을 마감했다. 애플사의 로고가 튜링이 깨문 독 사과에서 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스티브 잡스가 존경했던 인물. 극적으로 추락한 삶은 극적으로 복원됐다. 지난달 영국중앙은행은 그를 50파운드 지폐의 얼굴로 결정했다.

튜링이 뿌린 디지털의 씨앗 위에 자라난 후예들이 이 작은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우상(스티브 잡스)의 우상(튜링)을 찾아온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추모도 디지털식이다. 콩나물 모양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과 동상을 번갈아 본다. 이 모습을 일벌(Worker Bee) 조각이 내려다보고 있다. 일벌은 맨체스터의 상징. 산업혁명 때 일벌처럼 성실히 일하던 노동자를 상징한다.

1830년, 최초의 기차역

공원에서 튜링을 통해 현대 과학을 완상(玩賞)한 다음 시간을 거슬러 근대 산업 유산을 보기로 했다. 캐슬필드 지역에 있는 과학산업박물관(MOSI).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산업혁명을 압축해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1830년 지어진 세계 최초의 기차역을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킨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

19세기 맨체스터는 '코트노폴리스(Cottonopolis·면의 도시)'라 불렸다. 방적기와 방직기,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세계 면 공업의 중심지가 됐다. 박물관 안쪽 '텍스타일 갤러리'엔 산업혁명 당시의 방직기가 있다. 직원들이 수시로 방직기를 가동하면 수백 개의 실타래에 실이 감겨 올라간다. 석탄, 증기, 방적기, 면 공업…. 기억 저편, 파편으로 남아 있는 세계사 상식이 그물에 얽혀 후루룩 올라온다. 이 박물관은 과거의 화석이 아니다. 200여년 전 역사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 버리는 엔진이다.

꼭 가봐야 할 명분이 있다. 1830년 세계 최초로 지어진 기차역이 박물관 안에 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오간 세계 최초의 여객용 열차가 운행됐던 역이다. 아래층 대합실로 내려가면 난데없이 해시계가 있다. 1830년엔 해시계를 보고 사람들이 일일이 시간을 맞췄다. 해 뜨는 시간이 지역마다 차이가 나니 도시마다 시간이 제각각 달라 기차 운행에 차질이 있었다.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해 1880년 정부는 영국 전역에서 쓰는 하나의 표준시를 만들었다. 그때를 떠올릴 수 있도록 190년 전 해시계를 가져다 뒀다. 거대한 역사에 묻힌 일상의 디테일을 살려내는 섬세함. 이게 영국의 힘이다. 박물관엔 1948년 맨체스터대학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 '베이비(Baby)', 스티븐슨이 만든 증기기관차 '로켓'도 있다.

라우리의 성냥개비 사람

맨체스터에 가면 라우리(Lowry)란 단어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호텔에도, 아트센터에도, 쇼핑몰에도 보이는 이름. 맨체스터 토박이 화가 L. S. 라우리(Lowry·1887~1976)를 기린 이름이다. 영국 화가 하면 윌리엄 터너 정도 아는 한국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영국 교과서엔 빠지지 않는 화가. 그의 생을 담은 영화 '미세스 라우리&선'이 이달 개봉돼 영국에선 다시 붐이 일고 있다.

라우리는 42년간 맨체스터에서 집세 수금원으로 일했다. 일이 끝나면 화구를 챙겨 거리로 나갔다. 발품 팔아 그린 풍경화엔 그 시절 사진보다 몇 배 깊은 삶의 질감이 스며 있다. 그를 만나러 맨체스터 외곽 샐퍼드 키(Salford Quays)로 향했다. 2000년 라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든 복합 문화 공간 '더 라우리(The Lowry)' 안에 라우리미술관이 있다. 문 닫은 화물 선박용 부두를 재건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시 정부는 건축가 마이클 윌퍼드에게 건물 설계를 맡겼다.

2000년 화가 라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든 복합문화 공간 '더 라우리(The Lowry)'. 이 안에 라우리 미술관이 있다.
라우리가 그린 1930년 맨체스터 풍경. 공장에서 나오는 근로자들을 성냥개비처럼 표현했다.

라우리의 화폭 안에서 '맨체스터의 일벌'은 성냥개비처럼 얇고 비쩍 말랐다. 고된 일상과 세파는 완벽한 직립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걸까. 검은 옷에 파묻힌 사람들이 삶의 무게에 등 떠밀린 듯 비스듬히 기운 채 일터로 빨려 간다. 1930년대 공장으로 출근하는 맨체스터 근로자의 모습에 2019년 서울의 출근길 풍경이 겹친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앞을 향하는데 일벌의 일상은 제자리를 맴돈다.

'더 라우리' 앞에 놓인 다리를 건너 맞은편 '임피리얼 전쟁박물관 북관(Imperial War Museum North)'으로 향한다. 세계적 건축가 대니얼 리버스킨드가 설계한 건축 작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 윈스턴 처칠의 나라답게 영국엔 런던 등지에 5개의 전쟁박물관이 있다. 그중 하나다. 육중한 비정형 금속 덩어리 세 개가 붙은 외관에 대한 설명은 입구에 적힌 리베스킨트의 말이 대신한다. "지구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조각으로 건물을 만드는 걸 상상했다. 건물의 커다란 세 조각은 육지, 공중, 해상에서의 충돌을 의미한다." 리베스킨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를 둔 유대인 건축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등으로 보여준 '치유의 건축'이 이곳에서도 이어진다. 총검에 찔린 상처처럼 사선으로 예리하게 난 좁은 창이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산업혁명과 2차 대전, 2017년 폭탄 테러까지. 묵직한 역사가 관통하는 이 도시를 묵상하며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공간은 없다.

맨체스터 외곽 샐퍼드 키에 있는 임피리얼 전쟁박물관 북관. 건축 거장 대니얼 리버스킨드의 작품이다. 육중한 세 덩어리가 합쳐진 형태인데 각각 육지, 공중, 해상에서의 충돌을 의미한다.
여행정보

항공 한국에서 맨체스터로 가는 직항은 없다. 런던 히스로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하거나 런던 유스턴역에서 기차를 타면 맨체스터 피카딜리역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시내 교통 시내가 작아 외곽 지역을 빼곤 걸어 다닐 만하다. 영어를 어느 정도 한다면 지역 가이드와 함께하는 워킹 투어 추천. 'visitmanchester.com'에서 예약 가능. 무료 버스인 '프리버스(Free Bus)'가 두 개 노선으로 운행한다. 비싼 영국 물가 대비 '우버'도 저렴한 편. 주간 탑승의 경우 3㎞에 5파운드(7300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