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예술감독'이라니, 제가 가진 그릇에 비하면 너무 거창한 감투라 손발이 오그라드네요. 2년 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까진 저도 무명(無名)에 가까웠거든요. 콩쿠르 우승 부상으로 연주를 해도 한 회에 100만원이나 받을까 말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더 받은 제가 가시밭길 걷는 후배들을 위해 손 내밀고 싶었어요."

19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 선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왼쪽)과 센다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배 피아니스트 최형록씨. 선우예권은 다음 달 명동성당에서 후배 7명의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독주회를 연다.

2017년 미국 최고의 피아노 경연 대회인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받은 피아니스트 선우예권(30)이 다음 달 서울 명동성당에서 예술감독으로 데뷔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주최하는 '코리안 영(Young) 피아니스트 시리즈'. 다음 달 23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명동성당 내 파밀리아채플에서 매달 한 번씩 27세 이하 젊은 피아니스트 7인이 돌아가며 독주회를 연다.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선우예권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올 초 명동성당에서 먼저 연락이 와 깜짝 놀랐다. 내가 직접 연주자를 고르고 순서를 짜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연주자라면 누구나 청중을 불러 모으는 게 평생의 고민이잖아요. 저로 인해 한 분의 관객이라도 잘 여문 친구들의 연주를 찾아 들어준다면 뿌듯하겠다 생각했죠."

첫 주자는 러시아 지휘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에게서 열두 살에 러브콜을 받았던 임주희(19)다. 파데레프스키 콩쿠르 우승자 이혁(19), 헤이스팅스 국제 피아노 협주곡 콩쿠르 우승자 이택기(21), 클리블랜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2위의 임윤찬(15), 리스트 콩쿠르 2위의 홍민수(26),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4위 김송현(16), 올해 센다이 콩쿠르 우승자 최형록(25)으로 이어진다. 모두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망주다.

"4년 전 부산에서 만난 송현이는 음악을 아끼는 자세가 진지해 제일 먼저 추천했어요. 형록씨는 센다이 콩쿠르 1차 예선 때 연주 영상을 보곤 그 자리에서 '저 친구가 우승하겠다' 확신했지요. 눈 뗄 수 없는 연주였거든요." 앞서 오는 26일 오후 8시엔 후배들한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가 직접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독주회를 연다. 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과 쇼팽 '24개의 전주곡'을 들려준다. 근래 대성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주한 음악가는 2012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들려준 정경화, 2016년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연주한 트리오 오원(吾園) 등 손에 꼽는다. 공연은 이미 전 석 매진. 연주 수익금은 영 피아니스트 7인에게 돌아간다.

"나만 홀로 가는 삶이 아니란 걸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 깨달았어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사소한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그러면서 지치고 힘들 땐 이기적으로 매달리는 제가 친구들 눈엔 귀찮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 재영이와 영욱이, 첼로의 박유신은 다 이해하고 받아줬어요. 저도 누군가에게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