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5호실 빈소 앞에 '백두산함 승조원 일동'이라고 적힌 근조 화환이 놓였다. 대통령 명의 화환과 을지무공훈장도 빈소에선 보였다. 고(故) 신만균(1926~2019·사진) 예비역 해군 대령 빈소였다. 그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자 6·25전쟁 첫 승전(勝戰)의 주역 '백두산함(PC-701)'의 기관장이었다.

백두산함은 해군이 1949년 미국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초계정을 구입해 함포를 장착해 만든 배다. 구입 비용은 해군 장병 월급을 갹출하고, 해군 부인회가 삯바느질과 의복 세탁 등으로 벌어들인 1만5000달러에 나랏돈 4만5000달러를 보태서 마련했다. 그만큼 전투함을 갖고 싶은 해군의 갈망이 컸다.

북한의 6·25 기습 남침 첫날 밤,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무장 병력 600여 명을 태우고 동해안을 돌아 침투해오던 북한 1000t급 무장 수송선과 맞닥뜨렸다. 당시 상황을 "국기도 달지 않은 거대한 검정 선박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 서치라이트를 켰더니 갑판에 인민군 복장을 한 북한군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고 신 대령이 생전 설명했다고 그의 차남인 신현수(65)씨가 전했다.

6·25전쟁 때 사용된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왼쪽)과 백두산함 기관장이었던 고(故) 신만균 예비역 해군 대령.

아군의 선제 사격으로 교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양측이 원거리에서 부정확한 발포(發砲)를 이어가면서 포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포탄이 바닥나면 북한군은 부산에 상륙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기관장이었던 신 대령은 함장이었던 고(故) 최용남 예비역 해군 중령(1923~1998)과 상의한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최대 속도로 접근해 사격하고 불을 끈 채 후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 중령의 회고록에는 신 대령이 '백두산함의 알려진 성능을 뛰어넘는 최대 성능을 끌어내보겠다'고 보고한 것으로 나온다. 작전은 성공했고, 적함은 수십분의 전투 끝에 기관실이 파괴돼 침몰했다. 6·25 전쟁 첫 해전이자 승전인 대한해협해전이었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해군 장병은 76명. 하지만 이날 빈소에 신 대령 전우(戰友)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 당시 18~25세였던 이들이 대부분 90세를 넘기면서, 지병을 앓거나 거동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백두산함 승조원 76명 중 생존자는 8명이다.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92) 예비역 해군 대령은 본지 통화에서 "나보다 두 기수 선배였던 신 대령은 점잖고 자상했던 동료였다"고 말했다.

대한해협해전전승기념사업회 최경학 회장은 "당시 전투가 후대에 잊히지 않도록 생존 군인들의 이야기와 자료를 모아 대한해협해전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며 "북한 도발이 상존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전쟁 당시 흘렸던 선대의 피와 땀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