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압력밥솥은 그을음이 묻고 찌그러졌지만 엄마는 이걸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새것 좋아하는 엄마치곤 희한한 일이었다. "누룽지 만드는 데 이것만 한 게 없어"라고 했다. 아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도 꼭 "밥!"을 외쳤다. 엄마는 그때마다 "못 살아" 하면서 밥솥을 열고 밑바닥에 노릇하게 눌어붙은 밥을 긁어냈다. 한 움큼 그릇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김치와 오징어젓갈을 함께 내주면 아빠는 '후후' 소리까지 내며 따끈하게 눌은 밥을 떠먹었다. "밖에서 밥 먹고 온 거 아녔어?" 나의 물음에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밥이니? 이게 밥이지…."

재작년 관객 1400만명을 울린 영화 '신과 함께'에도 눌은밥 얘기가 나온다. 소방수로 일하다 목숨을 잃고 저승에 온 김자홍(차태현)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누룽지였다. 이승에 두고 온 어머니는 청각장애인이지만 자식에겐 매일 가스불에 냄비를 올리고 따끈한 밥을 지어줬고, 이때 노릇노릇한 누룽지도 만들어냈다. 자홍은 어머니가 눌어붙은 누룽지를 끓여 찢은 김치를 올려주던 장면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누룽지를 만들려면 일부러 약불로 오래 냄비 바닥을 달궈줘야 한다. 밥알이 오독오독 딱딱해지고 노릇해질 때까지 불로 구워줘야 더욱 맛있어진다. 대단할 건 없지만 손이 한 번은 더 거쳐야 나오는 음식이다. 아들을 생각하며 일부러 찬밥을 은근히 구워 바삭한 누룽지를 만들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자홍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가 왜 "이게 밥이지"라고 했는지, 왜 엄마가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아빠에게 누룽지를 끓여줬는지,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집에 돌아와 찬밥 한 공기에 물 한두 큰술을 넣고 냄비 바닥에 얇게 깔았다. 약불에 밥을 천천히 구워내는 동안 온 집안엔 구수한 냄새가 안개처럼 깔렸다. 바삭해진 누룽지에 따끈한 물을 부었다. 김이며 장아찌며 볶은 멸치 같은 반찬 몇 가지를 놓고 식구 셋이 둘러앉아 눌은밥을 먹었다. 남편이 낮게 속삭였다. "이게 진짜 밥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