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제출에서 사무실 짐 정리까지"...퇴사 대행 서비스 등장
기자가 직접 문의해 보니…퇴직 대행 비용은 30만~50만원
사표 수령➝대리 제출➝짐 수거➝퇴직금 정산 '풀서비스'
이직 많고 대면 소통 꺼리는 2030에 '인기'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껄끄러운 사표 제출, 10만원이면 대신해 드립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하모(23)씨는 최근 팀장과의 불화로 퇴사를 결심했다. 혼날 것이 두려워 사표 제출까지 미뤘던 하씨가 선택한 것은 ‘퇴사 대행 서비스’. A 대행업체는 하씨가 작성한 사표를 대신 내줬고, 회사 사무실에 남아있던 하씨의 짐을 찾아와, 집으로 배송해줬다. 하씨는 "상사가 무서울 만큼 상습적으로 폭언을 해 스트레스가 심각했다"며 "처음엔 서비스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팀장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퇴사를 깨끗하게 ‘끝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래픽=정다운

지난해부터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사직서 대신 내주기 서비스’가 국내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퇴사 과정에서 생기는 복잡한 일 처리와 스트레스까지 해결해 주겠다는 퇴사 대행 업체들이다. 직장 상사와 대면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20~30대 젊은층이 주요 고객이다.

◇직접 퇴사 대행 서비스 문의해 보니...아르바이트 퇴직은 30만원, 정규직 퇴직 50만원
퇴사 대행업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퇴사 대행'을 검색하면 5~6곳이 영업 중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사표 제출부터 인사팀 미팅 등 전 과정을 대리해준다"고 홍보했다.

기자가 직접 퇴사 대행을 의뢰해 보니 업체들은 현재 다니는 회사의 고용 환경과 노동법 위반 사항 여부 등을 물어보며 견적을 상담해줬다. 사표를 내도 회사가 곧바로 수리하지 않는 등 이유로 퇴직 과정에서 회사와 갈등을 겪을까 걱정하는 20~30대가 주 고객이라고 한다. A 대행업체 관계자는 "구체적인 숫자는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지만, 일본만큼 성행하고 있는 건 아니다"며 "다만, 회사나 상사로부터 피로도가 쌓인 20~30대와 여성이 주요 고객층"이라고 했다.

퇴직 대행 서비스는 총 4단계로 진행된다. ①의뢰인 상담 및 사직서 수령 ②사직서 대리 제출 ③사무실 짐 수거 ④사후 관리(퇴직금 또는 체불임금 정산) 등이다. 다만, 퇴사 시 불공정 계약 등 회사의 노동법 위반 사항이 발견될 경우에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회사에 공문이나 내용증명을 보내는 과정이 추가될 수 있다. 퇴사 대행업체 관계자는 "모든 서비스를 전부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가 인기가 많다"며 "다만 의뢰자의 요청에 따라 대리 제출, 사무실 짐 수거, 퇴직금 정산 등 필요한 서비스만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의뢰 비용은 업무의 난이도별에 따라 다르다. A 퇴사 대행업체에 따르면 퇴직 의사를 전화로 전달하거나 단순히 사표를 제출하는 업무는 10만~15만원. 회사 인사팀과 미팅이 필요한 경우는 30만원 정도였다. 회사 측에 더 빠른 퇴사와 퇴직금 정산 등을 종용하기 위해서, 인사팀과 미팅에 지원군을 투입하는 옵션도 있다. A업체 관계자는 "부모가 직접 가면 인사부서에서 부담을 느끼고 퇴사 처리를 빠르게 해주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경우 부모 역할 대행을 섭외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10만~20만원 추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취업박람회에서 상담받는 청년들

회사에 남은 짐을 의뢰인의 집으로 배송해 주는 상품도 있다. 퀵배송비를 포함해 약 5만원. 하지만 인사팀 미팅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짐배송은 무료 서비스였다.

B 퇴사 대행업체는 아르바이트생은 30만원, 정규직·계약직은 50만원을 제시했다. 일각에서는 퇴사 대행 서비스가 위법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회사와 교섭을 대행해주는 과정에서 변호사법을 위반할 가능성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직 도입 초기인 ‘퇴사 대행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편리하겠다며 이용하고 싶다는 반응이 있다면, 반면 아직까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반응도 있었다. 직장인 김모(27)씨는 "퇴사를 진지하게 고려 중인데 편해 보여서 굉장히 솔깃했다"고 했다. 대학원생 임모(30)씨는 "일본이나 가능한 일이지 우리나라에서 사표를 대신 제출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인 것 같다. 솔직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퇴사 대행 왜?...이직 많고, 대면 소통에 낯선 2030
퇴사 대행 서비스는 지난해 일본에서 처음 시작됐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내 퇴직 대행 서비스는 지난 여름부터 인터넷에서 확산해 30여 개 업체 정도가 운영 중이었다.

일본에서 이런 서비스가 나온 것은 고용 호황도 주요 요인이다. 20~30대 직장인들은 연봉이나 근무환경이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이직이 활발한 반면 회사는 후임자를 새로 뽑기가 어려워 퇴사를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은 "일본에선 퇴사를 배신, 근성 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면이 있다"며 "회사를 그만두려면 수차례 면담, 비난, 회유 등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직 문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게 퇴사 대행 서비스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역시 퇴사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대~30대 젊은층으로 분석된다. B 업체 관계자는 "손님 대부분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회 초년생이 많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거나 다른 회사로 재입사를 준비하려는 과정에서 퇴사에 대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퇴사 대행 서비스를 찾는다"고 했다.

조선DB

전문가들은 퇴직 대행 서비스가 등장한 이유를 밀레니얼 세대 특유의 성향에서 찾았다. 기존 노무 관행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퇴직 과정에서 느끼는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대행서비스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성 세대나 회사 측과 ‘대면 소통’에 익숙지 않은 점도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적 환경에서 자라 위계적인 조직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퇴사 과정에서도 ‘억압적 문화’가 작용하다 보니 이로부터 겪는 스트레스를 다른 기관에 위탁해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재근 문화 평론가는 "문자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 얼굴 보고 직접 말하는 걸 꺼리는 젊은 세대의 특성이 퇴사 과정에도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