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무역기구(WTO)의 한 축인 '개발도상국 지위'를 흔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에 무임승차해 있다고 중국 등 11개국을 거론한 지 일주일 만에 싱가포르와 아랍에미리트(UAE)가 사실상 백기 투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90일 시한으로 이들 국가에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으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한 가운데 해당 명단에 오른 한국에 대한 압박도 가중되고 있다.

5일 외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비교적 발전된 국가에 대한 WTO 개도국 지위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한 이후 싱가포르와 UAE가 사실상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다.

싱가포르 찬춘싱(陳振聲) 통상산업장관은 1일 블룸버그통신에 "싱가포르는 WTO 개도국 지위에 따른 혜택을 누리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AFP연합뉴스

앞서 UAE 경제부도 지난달 29일 "UAE는 당초 WTO 의무 조항상 미국의 요청에 구속되지 않는다"면서 "WTO 회원국들이 개도국 혜택 철회를 승인한다면 이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구매력 평가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에 있어 10위권에 드는 브루나이와 홍콩, 쿠웨이트, 마카오, 카타르,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등 7개 나라 및 지역을 불공정한 개도국 특혜 사례로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한국과 멕시코, 터키도 지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불공정 사례의 대표로 중국을 거론했지만, 중국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미중 무역전쟁의 영향으로 올 상반기 중국을 제치고 미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된 멕시코, 동남아 석유부국 브루나이 등은 미국의 압박으로 개도국 지위를 벗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낀 한국은 난처한 입장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이면서 WTO에서 개도국 지위를 갖고 있다.

한국은 1996년 OECD 가입 당시 선진국으로 분류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농업 분야에서 미칠 영향을 우려해 농업을 제외한 분야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개도국으로 남았다. WTO 체제에서 스스로 개도국이라고 선언하면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는데, 개도국으로 분류되면 농업 관세·보조금 규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농민들의 반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개도국 옷을 벗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 독자적 경제보복에 착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90일 시한이 끝나는 10월 말 이전에 한국도 개도국 지위를 벗고 선진국 그룹으로 완전히 적을 옮길지 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