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원 선거에서 낙승한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22일 대(對)한국 수출 규제 조치들을 계속 밀어붙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장 26일 각의(閣議·국무회의 격)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우방 명단)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법령 개정안을 의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화이트리스트가 적용되는 전략물자는 1100여개에 달한다. 지난 4일 발동돼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을 패닉에 빠뜨린 3개 품목 수출 규제가 산업 전(全) 분야로 확대되는 것이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이날 '일본 정부의 보복적 수출 규제 조치 철회 촉구 결의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일·한 청구권 협정 위반 행위" "신뢰의 문제"를 운운하며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수출 규제에 대해선 "(그에 대한) 대항 조치가 아니다"라고 했다. 앞뒤가 안 맞는 얘기다. 속내는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1965년 청구권협정을 위반했으니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부당한 무역 보복'이란 비판을 의식해 딴청을 피운 것이다. 일본 언론들조차 "수출 규제가 한국 대법원 판결을 의식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마이니치신문)이라고 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선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일본이 외교적 불만을 무역 보복이란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을 두고 "위선적이고 어리석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글로벌 무역 질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박수를 받아온 지도자라는 면에서 (수출 규제는) 매우 위선적인 행태"라고 했다. 미 LA타임스는 전날 칼럼에서 "(아베 총리가) 경제나 무역과는 관련 없는 문제로 다른 나라(한국)를 벌주기 위해 무역 제재를 사용해 세계 경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수출 규제를 "근시안적인 결정이자 무모한 자해 행위"라고 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도 "한·일 간의 무역 갈등은 '루즈-루즈 게임(lose-lose game)'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외신 보도의 배경에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일본이 이런 짓을 하다니…"란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일본은 '자유무역의 세례'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 대표적 국가다.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경제적으로 도약한 계기는 6·25전쟁 특수와 1955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가입이었다. 특히 미국 주도로 1947년 체결된 GATT는 관세 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해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발판이 됐다. 미국은 일본 재무장을 막기 위해 경제적 손실도 감수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은 미국의 희생으로 구축된 자유무역 체제의 최대 수혜자"란 인식이 강한 이유다.

전후 자유무역 체제의 근간은 최혜국 대우(MFN)다. 모든 교역 상대국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GATT를 계승한 WTO(세계무역기구) 제1조도 바로 이 내용이다. GATT 제11조 또한 '특별한 사유 없이 회원국 간 수출입 물량 제한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이 지난 4일 취한 수출 규제 강화와 곧 시행될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이 같은 국제 자유무역 체제의 원칙에 정면 배치된다.

일본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마이니치신문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반도체의 국제 공급망을 지지하는 자유무역을 왜곡하는 조치로, 무역을 정치에 이용한 대가는 무겁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한국 경제뿐 아니라 일본 기업에도 피해가 되돌아오는 극약 같은 조치"라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국 기업의 반도체 소재 조달 분산 움직임이 확산하면 '일본 이탈'을 부를 우려도 있다"고 보도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은 전후 자유무역 체제로 번성했고,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우리를 상대로 매년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며 캐시카우(수익창출원)로 삼아온 나라"라며 "그런 일본이 자유무역 원칙에 정면 위배되는 수출 통제 조치를 취한 건 자기 부정적 조치"라고 했다. 1965년부터 작년까지 53년간 우리나라는 단 한 해도 일본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동안 쌓인 대일(對日) 무역 적자는 총 6046억달러에 달한다.

일본은 지난달 28~29일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이었다. 아베 총리는 폐막 기자회견에서 "전후 자유무역 체제를 뒤흔드는 현 상황에 대해 우리 모두가 세계 경제를 이끌 원칙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며 "자유, 공정, 무차별, 열린 시장, 공평한 경쟁이라는 자유무역주의의 기본 원칙을 이번 G20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겨냥한 수출 규제 조치가 발표되기 이틀 전이었다.

조태용 전 외교부 차관은 "경제 외적인 문제(대법원 판결)에 수출 규제로 대응하는 건 자유무역의 모범국답지 않은 처사"라고 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21세기 제조업은 글로벌 공급 사슬이 얽히고설켜 있는데 경제 보복 자체가 너무 촌스럽고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아베 총리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장악력을 얻었다"며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을 상대로 시작한 어리석은(foolish) 무역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아베 내각에 경제 보복을 거둘 명분을 주기 위해 우리 정부가 외교적 절충안을 먼저 던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