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귀환'이다. 얼굴에 주근깨 가득하고 붉은색 머리를 지독한 콤플렉스로 여기지만, 엉뚱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빨강머리 앤'이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떠올랐다.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은 캐나다 소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1874~1942)의 1908년작. 출간된 지 100년 넘은 이 소설을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지고, 전시가 열린다. 넷플릭스에선 원작을 재해석한 드라마를 방영했다.

◇추억은 힘이 세다

'내 이름은 빨강머리 앤' 전시에 나온 일러스트레이터 마담 롤리나의 작품. 당당한 주근깨, 고집스러운 표정이 돋보인다.

한 가정에 입양된 고아 소녀 앤의 성장담을 그린 '빨강머리 앤'은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 상반기 '빨강머리 앤'을 주제로 출간된 책은 모두 12권. 지난달에만 4권이 나왔다. 원작 소설은 물론, '앤'을 소재로 한 에세이, 만화 등 다양하다.

지난 5월 더 모던 출판사에서 펴낸 소설 '빨강머리 앤'은 출간 두 달 만에 4만부 가까이 팔렸다. 일러스트를 따로 그리는 대신 1980년대 중반 국내 TV에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원화(原畵)를 쓴 것이 독자들을 움직였다. 장영재 대표는 "애니메이션에 향수가 있는 40대 초반 여성들이 책을 많이 샀다"고 했다.

어린이가 아닌 30~40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최근 나온 '빨강머리 앤' 관련 책들의 특징이다. 예스24에 따르면 구매자 중 30~40대 여성 비율이 69.5%이며, 40대 여성 비율은 46.2%로 절반 가까이 됐다. 지난달 '빨강머리 앤' '작은 아씨들' 등이 포함된 '걸 클래식 컬렉션 세트'를 출간한 윌북출판사 양혜영 편집자는 "어른들이 소장용으로 구입하도록, 추억을 소환하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추억은 힘이 셌다. 한 세트에 5만원이 넘는데도 한 달 만에 1쇄 2000세트가 다 팔렸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정신없이 달려오다 마흔 즈음 자신을 돌아보게 된 여성들이 어린 날 힘이 됐던 콘텐츠로부터 치유받는 것 같다"고 했다.

◇꿋꿋한 앤, 여성들 멘토로

'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왼쪽)과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에 실린 앤 일러스트.

꿋꿋하고 독립적인 앤은 여성들의 멘토가 되기도 한다. 일본 아동문학가 다카야나기 사치코(78)는 에세이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위즈덤하우스)에서 "앤은 그때까지 내가 알던 주인공들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한다. 순종하는 전통적 여성상과 달리 자기 주장 강한 앤으로부터 영향 받아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30대가 된 앤이 2030 여성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내용의 '그저 널 안아주고 싶었어'(프로작북스), 앤의 낙천성을 배우자고 이야기하는 '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사람과 나무사이)도 호응을 얻고 있다.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씨는 "앤은 독립적인 인물이며, 자신의 주체적 가능성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며, "여성의 자각과 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요즘 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소설의 실제 배경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미국 작가 캐서린 리드가 '앤'의 활동 무대인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풍광 사진과 함께 저자 몽고메리 이야기를 풀어간 '빨강머리 앤이 사랑한 풍경'(터치아트)도 지난달 출간돼 초판 2000부를 거의 소화했다.

관련 전시도 열리고 있다. 오는 10월 31일까지 서울 성수동 서울숲 갤러리아포레 MMM에서 열리는 '내 이름은 빨강머리 앤'은 앤에게서 영감받은 젊은 작가들이 일러스트, 설치 등 226점을 선보이는 전시. 전시를 만든 미디어앤아트 전상현 팀장은 "앤의 상상력과 낭만성,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삶이 현대 여성들에게 울림을 줄 거라 생각해 기획했다"며 "20~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했는데 앤에게 추억이 많은 40~50대 여성 관객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