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싱가포르항을 출발해 말레이시아 포트켈랑(Port Kelang)으로 가는 '에이치엠엠 프로미스(HMM PROMISE)' 기관실. 대형 보일러처럼 생긴 '스크러버(Scrubber)'라는 장치가 보였다. 스크러버는 배기가스 세정장치로 바닷물을 이용해 선박에서 배출되는 황산화물을 정화한다. 가동을 시작하자 노란색 화살표가 'bypass(우회)'에서 'scrubber(스크러버)'로 이동했다. 바닷물 유입량이 순식간에 '0'에서 '640(시간당 640t의 바닷물을 끌어올림)'으로 바뀌었다.

현대상선(011200)이 운항하는 '프로미스호'는 지난해 7월부터 전 세계 대형 컨테이너선으로는 처음으로 스크러버를 장착했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국제해사기구(IMO) 규제(해상 연료유의 황산화물 함량을 3.5%에서 0.5%로 감축)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안기범 현대상선 말레이시아법인장은 "스크러버를 쓰지 않는 선사는 고가의 저유황유를 써야할 뿐 아니라, 저유황유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면서 "현대상선은 경쟁사보다 앞서 IMO 환경규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남서부 포트켈랑에 정박중인 현대상선의 컨테이너선 ‘프로미스호’.

◇ 배기가스 세정장치 ‘스크러버’ 이용하면 연료비 절감

프로미스호는 1만10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화물선으로 13~14노트(시속 24~26Km) 속도로 운항시 하루 40t 정도의 벙커C유를 사용한다. 이 배에 스크러버가 없다면 당장 내년 1월부터 t당 가격이 600달러(71만원) 수준인 저유황유를 써야 한다. 하지만 스크러버를 활용하면 저유황유보다 t당 가격이 33% 이상 저렴한 400달러(47만원)짜리 고유황유를 써도 바닷물을 이용해 황산화물 함량을 0.5%로 낮출 수 있다.

초기 스크러버 장착 투자비(82억~94억원)가 들지만, 하루에 8000달러(940만원)의 기름값을 아낄 수 있다. 프로미스호 정문규 기관장은 "아직까지 저유황유를 공급할 수 있는 항구는 한국, 유럽, 미주 등 일부"라며 "저유황유 공급이 부족할 경우 당장 내년 1월부터 운항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고유황중유 수요는 올해 하루 350만배럴에서 내년에 하루 140만배럴로 크게 감소하는 반면, 저유황중유 수요는 올해 하루 10만배럴 미만에서 내년에 하루 100만배럴로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글로벌 연료유 시장이 재편되면서 선사들의 저유황유 수요는 늘고 있는 반면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프로미스호에 설치된 배기가스 세정정치 ‘스크러버’.

고유황중유를 저유황중유로 대체하면 비용절감은 물론 황산화물 배출량이 1t당 24.5Kg에서 3.5Kg으로 약 86% 감소한다. 미세먼지 배출도 줄어 해양오염을 줄일 수 있다. 현대상선은 올 3월 한국해양진흥공사 등과 ‘친환경설비(scrubber) 설치 상생펀드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현재 운항중인 주요 컨테이너선 19척에 대해 내년 상반기까지 스크러버 설치를 완료할 예정이다. 총 투자비는 1533억원으로 현대상선이 460억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한국해양진흥공사의 보증부 대출(623억원)과 5개사(현대종합상사 등)의 투자 펀드로 조달할 계획이다.

◇ 2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12척, 아시아-북유럽 항로에 투입

글로벌 해운업계는 최근 ‘친환경 규제·대형화’라는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해운 역사상 가장 강력한 IMO 환경규제를 충족하는 것은 물론 초대형 컨테이너선으로 운송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큰 배를 사용하면 한번에 많은 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다.

현대상선은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이 건조중인 2만3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을 내년 2분기부터 아시아-북유럽 항로에 투입한다. 현대중공업이 건조중인 1만5000TEU급 컨테이너선 8척도 2021년 2분기 이후 투입할 예정이다. 내년과 내후년에 투입하는 20척에는 모두 스크러버를 장착한다는 방침이다.

안기범 법인장은 "말레이시아 포트켈랑은 인도·중동을 가는 선박이 들리는 항구인데, 최근 선박의 대형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며 "글로벌 해운업계의 치킨게임이 계속되면서 대형선 발주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상선 말레이시아법인은 처리물동량이 2017년 16만2000TEU에서 지난해 25만9000TEU로 60% 증가했다. 말레이시아법인은 신규 화주 확보를 위해 물류비 절감과 운송기간 단축이 가능한 ‘허브 비즈니스’를 추진중이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플라스틱 레진을 수출하는 화주를 위해 포트켈랑 터미널에서 한달간 무료로 화물을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포트켈랑에 보관된 화물을 중국으로 보낼 경우 화주 입장에선 운송거리를 단축하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