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리사 이유석씨는 요즘 마음이 급하다. 그는 “국숫집 ‘유면가’ 개점 날짜를 오는 23일로 잡았는데, 막국수 면발이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월까지 이씨는 프랑스 요리사였다.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루이쌍끄(Louis Cinq)’를 운영했다. ‘와인 마시기 좋은 맛집’으로 이름 나고 프랑스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 서울판에도 등재되면서 장사도 꽤 잘 됐다. 하지만 그는 영업한 지 꼭 10년째인 지난 1월 31일을 끝으로 레스토랑을 접고 국숫집 준비에 나섰다.

#2: 한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던 한식’으로 서울과 뉴욕에서 각각 2개씩 총 4개의 별을 미쉐린으로부터 받은 ‘정식당’ 오너셰프(요리사 겸 주인) 임정식씨는 지난해 1월 인천공항 제2터미널 면세구역 안에 마련한 ‘평화국수’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출국장 3층에서 국밥 등 한국 서민음식을 고급스럽게 풀어낸 ‘평화옥’도 운영한다. 임 셰프는 “해외 요리사들은 파인다이닝(fine dining·고급 미식)을 통해 명성을 얻고, 캐주얼한 세컨드 브랜드를 통해 수익을 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정식당의 세컨드 브랜드라고 할 ‘평화’라는 이름을 내건 대중식당을 계속 늘려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3: 한남동 유명 프랑스 레스토랑 ‘그랑 아무르(Grand Amour)’ 오너셰프 이형준씨는 지난 5월 이태원에 ‘슈퍼막셰(Supermarché)’를 열었다. 프랑스어로 수퍼마켓이란 뜻이다. 음식 가격이나 판매 방식이 수퍼마켓 또는 대형마트와 비슷하다. 샌드위치, 파스타, 피자, 수프, 소시지 등 대중적인 서양음식을 8000원~2만원대에 판매한다. 카운터에서 음식을 사서 매장에 마련된 테이블에 놓고 먹을 수도 있고, 포장해 집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이 셰프는 “프랑스에는 파인다이닝만 있지 않다”며 “파리 젊은이들이 즐기는 경쾌한 프랑스 식문화를 서울에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른바 ‘파인다이닝’이라 불리는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요리사들이 국수나 샌드위치처럼 대중적이고 캐주얼한 음식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이유석 요리사는 “지난해 초부터 손님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저희는 그래도 매출이 잘 나오는 편인데도 전과 비교하면 20% 정도 줄었어요. 주변 다른 레스토랑들은 30~40%씩 매출이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경제도 불황인데 식당 운영 환경은 더 힘들어졌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임금 인상이 겹치면서 인력이 특히 많이 요구되는 파인다이닝은 직격탄을 맞았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손님에게 나가는 음식도 손이 많이 가지만 접객 즉 손님에 대한 서비스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 식당보다 종업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이형준 요리사는 “공기(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외식을 즐기는 손님층이 축소되고 있어요. 10년 전 파인다이닝을 찾던 손님 분들이 요즘은 찾지 않으세요. 그렇다고 요즘 30대 초중반 젊은 층이 새롭게 유입되지도 않고 있고요. 김영란법으로 법인카드를 쓰던 비즈니스 접대 손님층이 급감했고, 당연히 강화돼야 하지만 음주 단속이 더 엄격해지면서 ‘아예 마시지 말고 먹지 말자’는 쪽으로 공기가 바뀌었나 봐요. 소비문화가 전반적으로 위축된 듯해요.”

누들바 미연 목진석 셰프, 슈퍼막셰 이형준 셰프, 유면가 이유석 셰프.(왼쪽부터)

임정식 요리사는 “파인다이닝은 원래 명예를 위한 선택이지 수익을 낼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고 했다. 그는 정식당도 모던한식을 초기에 알린 레스토랑으로 명성이 높지만 채산성은 높지 않다고 말한다. 파인다이닝은 운영·유지 비용도 높지만 끝없이 투자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4: 목진석 요리사는 지난해 6월 서울 신사동에 ‘누들바 미연’을 열었다. 중국 탄탄면과 닭고기 볶음국수, 양고기 라구(소스)를 곁들인 파스타 등 면요리 전문점이면서 바오번(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끼워 넣은 찐빵), 고추잡채, 마라탕 등 가벼운 스낵과 술안주를 판다. 호주와 미국에서 요리를 배우고 시드니를 대표하는 레스토랑 ‘키(Quay)’, 서울의 미쉐린 2스타 ‘권숙수’ 등에서 경력을 쌓은 요리사가 고급 식당이 아닌 국숫집을 연다는 건 이례적이었다. 목 요리사는 “뉴욕 모모푸쿠(Momofuku)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장(한국명 장석호)이 롤모델”이라고 했다.

목 셰프가 롤모델로 삼았다는 데이비드 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 요리사. 2004년 뉴욕에서 일본 라멘집으로 출발해 라스베이거스·워싱턴DC, 호주 시드니, 캐나다 토론토 등에 20개가 넘는 레스토랑·카페·바 등을 거느린 ‘모모푸쿠 레스토랑 그룹’을 운영 중이다. 미쉐린 별 2개, 2008년 뉴욕타임스 선정 최고의 식당, 2010·12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고, 넷플릭스 ‘어글리 딜리셔스’ 등 각종 방송에도  출연했다.

장씨는 세계 외식 트렌드를 ‘고급 엘리트 요리’에서 ‘대중적이고 캐주얼한 음식’으로 뒤집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후 요리사들은 정제되고 고급스런 음식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한국 요리사들도 대중적이고 캐주얼한 식당 오픈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첨단의 맛을 추구하던 요리사들답게, 이들이 내는 음식은 대중적이지만 진부하지는 않다. 이유석 요리사는 막국수 면발에 흑임자 가루를 섞어 고소한 향을 더했고, 이형준 요리사는 슈퍼막셰에서 국내에 덜 소개된, 프랑스식으로 해석한 모로코·베트남·멕시코 음식을 선보인다. ‘파인다이닝이 가미된 캐주얼 요리’랄까. 목진석 셰프는 “비싸지 않고 캐주얼한 식당이기 때문에 친구들이나 가족들도 편하게 올 수 있다는 접근성도 장점이지만, 음식도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과감할 수 있다”고 했다.

레스토랑 출신 셰프가 운영하는 캐주얼 맛집

한·중·일 ‘면요리 삼국지’를 내세운 국숫집. 이유석 요리사는 “삼국의 면요리 3가지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되 내용은 계속 새롭게 바꿔주려 한다”고 했다. 오는 23일 가게 문을 열 때는 한국 막국수와 중국 뱡뱡몐, 일본 라멘을 선보인다. 막국수는 매콤달콤새콤 익숙하지만 살짝 업그레이드된 맛을 추구했다. 뱡뱡몐은 중국 산시성 면요리. 넓고 긴 면발 때문에 ‘벨트 국수’라 불리기도 한다. 흑초와 고추기름을 다진 고기, 버섯 등과 볶은 소스는 시큼한 맛과 매운맛이 도드라진다. 라멘은 어패류를 기본으로 뽑은 맑고 시원한 국물에 충분히 숙성시킨 면을 말아 낸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길 51-1

수퍼마켓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조리된 음식을 사가거나 매장에서 먹을 수 있는 델리(deli)에 더 가깝다. 양파수프, ‘프랑스식 갈비찜’ 비프 부르기뇽 같은 서민적인 프랑스 음식과 함께 피자, 병아리콩을 으깨 만든 중동음식 허머스, 치즈 파니니, 치킨 커리 등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젊은 파리지앵들에겐 이미 집밥처럼 친숙한 음식을 고루 판다. 거의 모든 메뉴가 테이크아웃 가능하다. 알록달록 화려한 인테리어와 외관 덕분에 지난 5월 오픈과 동시에 ‘인스타그램 성지(聖地)’로 등극하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22-26

모던한식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임정식 요리사가 인천공항 제2터미널 면세구역 안에 지난해 열었다. 3층 출국장에 있는 한국 서민음식을 고급스럽게 풀어낸 ‘평화옥’도 운영한다. 매운양곰탕국수, 깻잎국수, 매운양곰탕.

세계 여러 나라의 국수 요리 전문점을 표방한다. 본토 맛을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해석해 업그레이드된 맛을 선보인다. 탄탄면이 대표적이다. 중국 사천 지역의 대표 면요리인 탄탄면은 원래 국물이 없는 비빔면이나, 홍콩과 일본 등지에서 현지 입맛에 맞게 국물이 있는 음식을 변형됐고 이것이 세계적으로 탄탄면으로 알려졌다. 미연에서는 비빔면이라는 탄탄면 본연의 형태를 복원하는 한편 얼얼하게 매운 ‘마라(麻辣)’를 제대로 표현해 낸다. 갈릭버터골뱅이 파스타, 마라떡볶이, 바오번(돼지고기), 고추잡채, 육포볶음밥, 바지락 중화술탕.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54길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