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원전 단지는 경주시 양남~양북면에 걸쳐 바닷가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수로 4기(월성 1~4호기)와 경수로 2기(신월성 1~2호기)가 있다. 이 중 월성 1호기는 작년 6월 폐로(廢爐) 방침이 결정됐다. 그런데 월성 2~4호기의 세 원전마저 문재인 정부 임기 만료 전 가동을 멈추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임시 보관하는 단지 내 저장 시설이 2021년 11월 가득 찰 전망이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이미 박근혜 정부에서 공론화위원회(2013년 10월~2015년 6월 활동)를 거친 끝에 2016년 7월 '관리 기본 계획'을 확정했다. 핵심은 '2029년까지 영구 처분장 부지 선정, 해당 부지에 2036년까지 중간 저장 시설 건설, 2053년까지 영구 처분장 완공'이었다. 2036년 중간 저장 시설 마련 전까지는 각 원전 단지 부지 내에 임시 저장 시설을 확충해 보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관리 기본 계획을 폐기 처분했다. 일종의 적폐(積弊) 판정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월성 원전 중수로의 임시 저장 시설 포화 상태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중수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 다발은 우선 습식 저장조에 담아두게 된다. 여기서 6년을 보관해 방사능을 떨어뜨린 다음 건식(乾式) 보관 설비(2006년까지는 캐니스터, 2007년부터는 맥스터)로 옮기게 된다. 현재 월성 원전 습식 수조는 포화율이 85%, 건식 설비는 92%까지 와 있다. 따라서 맥스터 설비를 빨리 확충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부지 다 닦아놨지만… 정작 착공은 못해 - 월성 원전 단지 내부에 조성된 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 설비. 앞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오른쪽 아래 단의 흰색 원통형 설비가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지은 캐니스터(300기), 왼쪽 위 단의 창고 스타일 콘크리트 건물이 2007년부터 운용해온 맥스터(7기). 앞쪽 넓은 공터는 추가로 맥스터 7기를 짓기 위해 미리 닦아놓은 부지다.

현재 7기를 운용 중인데, 바로 옆에 추가로 7기를 지을 부지도 닦아놓은 상태다. 맥스터 건설엔 19개월 걸린다. 내년 4월에는 착공해야 하고, 그러자면 재검토위원회의 결론이 3월까지는 나와야 한다.

상황이 급한데도 현 정부는 절차를 질질 끌어왔다. 2017년 7월 '사용후핵연료 재(再)공론화' 방침을 밝힌 후 2018년 5월이 돼서야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 재검토 준비단'이라는 걸 발족시켰다. 탈원전을 밀어붙이느라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낸 것이다. 재검토 준비단은 재공론화에 관한 일종의 규칙 제정을 맡았는데 2018년 11월까지 6개월 활동해 의제 27건을 정리했다. 그다음 6개월을 더 지체하고서야 지난 5월 29일 재검토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일부러 시간을 끌어 월성 원전 가동을 중단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제기했다.

재검토위원회 위원 15명은 행정학·법학·언론학·통계학 등의 중립적 교수와 변호사로 구성됐다. 이해 당사자인 원자력계와 환경 단체는 배제됐다. 이에 환경 단체 쪽에선 강하게 반발하는 중이다. 지난 정부의 공론화위원회도 1년 8개월을 활동했다. 이런 식으로 갈 때 재검토위원회가 9개월 동안 월성 건식 설비의 확충을 결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환경 단체들은 재검토위원회가 영구 처분장의 부지 선정 방식, 중간 저장 시설 건설 여부와 방법, 임시 저장 시설 규모와 운영 기간 등의 원칙 문제부터 다루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다음 개별 단지별 지역 실행위원회를 구성해 임시 저장 시설 확충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중간 저장 시설, 영구 처분장을 언제 어떻게 지을지 정해져야 임시 저장 시설의 필요 규모가 나오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러나 시간을 더 지체하면 월성 원전은 기존 시설의 포화 시점까지 추가 시설을 지을 수 없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면 월성 2~4호기가 멈춰 서는 사태에 직면한다. 월성 2~4호기의 원래 1차 수명은 2026~2029년까지다.

원자력계와 지역에선 이런 사정을 고려해 우선 급한 월성 원전만 따로 떼내 임시 저장 시설 확충 문제를 결정짓자고 하고 있다. 환경 단체는 "그건 저장 시설 추가 건설을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월성 원전은 전체 부지가 270만㎡이다. 건식 저장 시설인 캐니스터와 맥스터는 2만7800㎡ 규모다. 전체 부지의 100분의 1밖에 안 된다. 바다 쪽으로 원통형 캐니스터가 300기, 육지쪽으로 2층 건물 형태의 직사각형 맥스터 7기가 있다. 기존 7기 옆쪽에 새로 맥스터 7기를 지을 수 있는 부지가 이미 닦여 있다. 건설업체와 시공 계약까지 맺은 상태다.

캐니스터는 직경 3m, 높이 6.5m의 원통형 철근 콘크리트인데 내부에 사용후핵연료 540개 다발을 담은 철통이 들어 있다. 맥스터는 한 건물에 캐니스터에 담은 것과 같은 형태의 강철통 40개씩 보관한다. 캐니스터가 단독주택이라면 맥스터는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맥스터 1기가 중수로 3기의 대략 1년치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수 있다. 건식 설비로 옮기기 전 습식 수조에서 6년을 보관하면 사용후핵연료 방사능은 100분의 1로 떨어진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설비 표면에 1년 내내 몸을 대고 있으면 캐니스터에선 의료 CT 10장, 맥스터는 20장을 찍는 수준의 방사선을 쬐게 된다. 1m 두께 콘크리트로 둘러싼 2층 높이 설비의 안전성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월성 원전 단지에는 2012년과 2015년 상업 운전에 들어간 경수로 신월성 1·2호기도 있다. 경수로에선 호기당 연간 48다발(가로 세로 20㎝, 길이 450㎝ 직육면체)의 사용후핵연료가 나온다. 반면 중수로에선 호기당 4800다발(직경 10㎝, 길이 50㎝ 원통형)이 나온다. 경수로는 우라늄 235 비중이 3~5%인 농축우라늄을 연료로 쓰는 데 반해, 중수로는 0.7%짜리 천연 우라늄을 쓰기 때문에 사용후핵연료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내 원전 단지 가운데 월성에서만 습식 단계를 지나 건식 저장 시설을 운용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 처분 시설은 어차피 만들어야 한다. 다음 정부들이 탈원전 정책을 이어간다 하더라도 이미 배출된 사용후핵연료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시설을 짓지 않을 수 없다. 환경 단체들은 이걸 잘 알면서도 영구 처분장 건설과 지역별 임시 저장 시설 확충을 트집 잡거나 반대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 시설을 물고 늘어져 원자력 논란에 더 불을 붙이고 궁극에는 원전들을 멈춰 세워야 하거나 더 짓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자는 생각일 것이다.


"월성 원전 가동 중단땐 경주 지역경제 치명타… 하루 빨리 저장시설 늘려야"

지난 4일 월성 원전 취재차 경주로 가기 전엔 지역 주민들이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고로 쓰는 맥스터 증설에 반대할 것으로 예상했다. 막상 현지에서 만나본 경주시 원전범시민대책위 남홍〈사진〉 위원장 말은 완전히 달랐다. '맥스터를 조속히 추가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원전범시민대책위원회는 작년 11월 시 조례에 따라 구성된 경주시장 자문 기구다. 남 위원장은 2008년 구성된 경주시 핵대책시민연대 대표로도 활동했다.

남 위원장은 "금년 내 맥스터 추가 시설을 착공하지 않으면 나중에 월성 원전 2~4호기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닥치게 되니 재검토위원회는 월성 원전 문제를 다른 지역과 분리해 빨리 결론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시간 싸움'이라고도 했다. 남 위원장은 "만일 임시 저장고를 만들지 못해 월성 원전이 멈춰 서면 지역부터 큰 피해를 보게 된다"고 했다. 월성 원자력본부 직원 1600명 가운데 11%가 경주 출신이라는 것이다. 직원 채용 때 지역 주민 가점 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협력업체 직원 1400명 중 25%도 경주 출신이라는 것이 월성 원자력본부 설명이었다. 우선 이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월성 원전에서 경주 지역에 납부하는 지방세와 지역 지원 사업비를 합쳐 연 570억원이 넘고, 경주 업체와 계약한 각종 사업 금액도 1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남 위원장은 "원전은 장치 산업"이라고 했다. 이미 엄청난 돈을 들여 발전소 시설을 지어놨고, 이걸 최대한 활용해 부가가치를 뽑아내는 게 국익(國益)에 맞는다는 것이다. 7000억원을 들여 부품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한 월성 1호기를 폐로시킨 정부 조치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