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코드 미디어 디렉터

지난 1일은 소니의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워크맨이 세상에 등장한 지 정확하게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워크맨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듣게 해 준 혁명적인 기기였지만, 소니는 처음부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로 워크맨을 설계하지 않았다. 원래는 취재기자들이 인터뷰를 손쉽게 녹음할 수 있는 ‘프레스맨’이라는 휴대용 녹음기로 개발된 제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녹음기보다는 플레이어로 더 유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녹음 기능을 없애고 헤드폰 잭을 붙여서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로 바꿨고, 그 결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적인 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워크맨의 40주년 기념일은 대중으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주위에서 워크맨을 만날 일이 없어졌고, 30대 이하 세대에서는 그저 전설처럼 들어본 기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제조사로서의 소니의 명성은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 시대 너머로 이어지지 못했다.

왜일까? 음질 때문은 아니었다. 소니는 그 후에도 음질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좋은 기기를 선보였다. 워크맨의 몰락을 가져온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들이 가진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음악 콘텐츠를 음반 제작사가 정한 순서대로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었다. 저장된 수천 곡 중 그때그때 원하는 것만 찾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혁명이었다. 소니는 비슷한 경쟁 제품을 내놓으며 실지를 회복하려 했지만, 시장은 원하는 곡을 가장 빠르고 직관적으로 찾을 수 있게 설계된 애플의 아이팟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아이팟을 비롯한 디지털 미디어가 가져온 혁명은 바로 '비선형적(non-linear)' 미디어 소비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음악을 앨범의 첫 곡부터 순서대로 소비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앨범 전체를 구매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일주일에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봐야 하는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라디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공급자가 정한 순서를 따르게 하는 선형적(linear) 미디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소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는 비선형적 미디어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각종 팟캐스트 같은 뉴미디어는 그렇게 전통적인 미디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변한 미디어 소비 방식 때문에 카세트테이프와 CD 기기들을 은퇴시켜 버린 아이팟의 영광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고,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듣던 사람들은 음악을 다운로드받는 대신 스트리밍을 선택했다.

애플은 변화하는 시장에서 소니보다 발 빠르게 대응했다. 아직 아이팟이 잘 팔리고 있고, 아이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9년에 음악 스트리밍 기업인 랄라를 인수해버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스트리밍 시장은 아직 미약했고, 애플은 아이튠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음악을 잘 팔고 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행동 변화에 민감한 풍향계를 가지고 있던 애플은 빠른 대응 덕분에 이제는 대세가 된 음악 스트리밍 시장에서 스포티파이에 이어 2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애플이 시장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동안 소니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디오 MP3, 하이엔드 워크맨 등 작은 틈새시장의 소비자들을 위한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비록 제품은 우수했고, 프리미엄급 음질로 호평을 받았지만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제품이었고, 초기 워크맨의 대중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니는 소비자들이 MP3 찾을 때 CD를 작게 만들었고, 대중이 스트리밍으로 넘어가기 시작할 때 고급 MP3 기기를 만들고 있었다. '제조사가 제품을 제일 잘 안다'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 업계도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미국인들은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자동차 핸들의 각도와 길이를 조절하기를 원하는데,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가장 완벽한 각도와 길이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데 운전자가 함부로 바꾸게 할 수 없다며 버텼다. 하지만 미국 소비자들이 외면하자 결국 굴복해서 조절 기능을 넣었고, 그 덕분에 독일 기업들은 미국의 고급차 시장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