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용(77) 전 주일 대사는 4일 본지 인터뷰에서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 관계에 대해 "정상 간 신뢰 부재가 낳은 결과물이며, 결국 두 정상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최 전 대사는 1998년 한·일 관계의 새 이정표로 평가받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준비에 깊이 관여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주일 대사(2000~2002년)를 지냈다.

최 전 대사는 "지난주 오사카 G20(주요 20국) 회의에서 양국 현안을 논의할 기회였던 한·일 정상회담이 끝내 무산된 것이 뼈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향후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에 이어 한국의 '일본 기업 압류 자산 현금화 조치'까지 이어질 경우, 한·일 관계는 위험한 패닉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올 하반기 '골든 타임'을 놓치면 양국 관계가 '회복 불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 전 대사는 "양국 지도자들이 국민 감정보다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해 언제든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선 "외교를 도덕화해 상대국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향해선 "이번에 일본이 꺼내 든 사실상의 경제 보복 조치는 '한·일 평화의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했다.

최상용 전 주일 대사가 4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한·일 관계 악화의 원인과 개선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최 전 대사는 “정상 외교 부재가 최악의 한·일 관계로 이어졌다”며 “앞으로 기회가 올 때 두 정상이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한·일 관계 악화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정상 간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장기화돼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다. 과거 한·일 문제는 정상 간 신뢰에 기반한 협상으로 풀어왔고, 내가 주일 대사로 있던 2000년대 초 일본 교과서 문제도 그렇게 풀었다. 하지만 지난 7년간 다자회의 때를 제외하고 '의미 있는'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오사카 G20 회의라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G20 회의 전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 의사를 밝혔고, 정부가 징용 문제 해법으로 '한·일 기업 출연 기금안'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 발표안(1+1 기금안)은 의미 있는 대안이었지만, 보란 듯이 일본에 거부당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그 전까지 일본의 여러 제안에 우리 정부가 책임 있는 답변을 안 했는데, 좀 더 일찍 이 안을 내놓고 일본과 사전 협의를 했어야 했다. 우리 외교의 미숙이다. 정상회담도 '일본 레이와(令和) 시대 양국 관계 발전' '2020년 도쿄올림픽' '북한 문제 협력' 등 건설적인 접점을 명분으로 더 일찍 협의하지 않아 끝내 불발된 것이다."

―당장 정상회담이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반전의 계기가 있다고 보나.

"한동안은 불가피한 냉각기가 이어질 것이다. 다만 양국 정상이 언제든 기회가 될 때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앞으로 일본의 추가 경제 보복에 이어 한국의 '일본 기업 압류 자산 현금화 조치'까지 이어질 경우, 한·일 관계는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외교 채널을 가동해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

―4일부터 강화된 일본의 '대(對)한국' 반도체 핵심 소재 3종 수출 규제 조치로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50년 이상 '평화'와 '일본'을 공부해온 학자이자 일본의 친구로서 아베 총리에게 고언(苦言)하고 싶다. 통상·경제는 갈등 관계에 있는 두 나라의 분쟁을 막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이른바 '통상 평화'다. 또 일본의 이번 조치는 '아름다운 평화'를 뜻하는 일본 연호 '레이와', 아베 총리가 주장해온 '적극적 평화주의'와도 맞지 않는다."

―한국 정부도 대일(對日) 강경 기조를 굽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한·일 관계를 바라본다.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외교를 도덕화해 상대국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협상이 불가능하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도덕적 우선권이 있는 쪽이 관대하게 나가면서 명분·실리를 동시에 확보한 전례가 있다. 바로 일본의 식민 지배 반성·사죄를 구체화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일본 국회 연설에서 '일본이 과거사를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면서도 전후 일본이 쌓은 평화와 경제성장, 한국 외환 위기 극복에 공헌한 점에 감사도 표했다."

―과거사 문제와 다른 현안을 구분하자는 '투 트랙 전략'은 가능한가.

"투 트랙이라는 말이 애매하지만 외교에는 효과적이다. 일본은 과거사·영토 문제로 오랜 긴장 관계에 있는 중국과도 경제 협력은 강화하고 있고, 시진핑 주석의 내년 국빈 방문을 요청했다. 북한에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도 투 트랙 외교 시도다. 다만 투 트랙 외교는 정상 간 신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한·일 간엔 그게 빠져 있다. 과거사 관련 '쟁점'은 외교 협상으로 해결해 나가고, 한반도 평화와 경제 협력, 문화 교류 등 '접점'은 두 정상이 큰 그림을 같이 그려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