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있는 KEB하나은행 을지로 본점 직원들은 회사에 '내 자리'라는 게 없다.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해 자기 부서가 있는 층에 도착하면 입구에 설치된 대형 터치스크린 앞에 서서 자기가 오늘 앉아서 일할 자리를 손으로 눌러 고른다. 한 번 앉은 자리에는 5일 동안 앉을 수 없다. 본부장 이상 임원만 빼고 부장, 팀장 등 모두가 똑같이 자리를 옮긴다. 지난 2017년 9월 을지로 본점을 새로 만들었을 때부터 도입한 '스마트 오피스' 시스템이다. 자리를 '강제로' 섞이게 해서 직원들끼리 조금이라도 더 소통하게 만들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독려하려고 이런 구조를 만들었다. 좌석마다 놓인 컴퓨터에 로그인만 하면 자기가 전날까지 작성하던 문서나 저장한 파일 등을 그대로 불러올 수 있는 클라우드(가상 저장 공간) 시스템도 깔려 있다. 개인 소지품은 층마다 배치된 사물함에서 꺼낸다.
IT(정보기술)를 앞세운 인터넷은행, 핀테크 스타트업의 등장에 맞서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업무 환경을 바꾸는 색다른 공간 전략을 짜내고 있다. 위계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기존 금융회사의 문화를 깨기 위해 사무실 칸막이를 없애거나 임원실 크기를 줄이고 조직 구조를 바꾸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공간부터 바꿔야 마음가짐도 바뀐다
2년간 스마트 오피스 실험을 하면서 하나은행은 비용 절감 효과도 봤다. 하나은행이 직원들의 근무 패턴을 조사해봤더니 휴가나 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직원을 감안하면 전체 정원에서 85% 정도만 늘 건물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을지로 본점 안에 정원의 85%만큼만 자리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연간 20억~3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낀 돈으로는 직원용 도서관이나 피트니스센터, 캡슐 수면방 등을 만들었다.
한발 더 나아가 최근 을지로 본점 24층 한 개 층을 별도의 스마트워크센터로 만들고 있다. 특정 부서나 팀 단위가 아닌 특별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하나금융 여러 계열사에서 온 직원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근무 공간을 꾸미는 것이다.
다른 금융회사도 공간 혁신에 분주하다. 우리은행의 경우 디지털금융그룹이 입주한 서울 남산센트럴타워 20~21층에서 스마트 오피스 실험을 한다. 부서 사이 칸막이를 없앴고, 직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색다른 회의 공간을 만들었다. 특히 회의실 이름을 직원 공모와 투표를 통해 정했다. '모다방'(모두 다 이야기해야 하는 방), '오래안되방'(오래 회의하면 안 되는 방) 등이다.
신한은행의 IT 사업을 이끄는 디지털그룹이 입주한 서울 중구 부영빌딩 16층은 IT 기업 분위기가 물씬 난다. VR(가상현실) 기기나 최신 스마트폰 등 IT 제품을 책상 바로 옆에 배치해 언제든 새 서비스를 실험해볼 수 있게 했다. 또 본부장 이상 임원 방은 크기를 기존의 절반으로 줄였고 부서장들도 칸막이가 없는 평평한 책상에서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 일한다.
◇임원 방 없애고 CEO가 수시로 직원들과 토론
변화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씨티은행의 경우 내년 4월 서울 종로구 씨티뱅크센터 빌딩으로 본점을 옮기면서 이 건물 전체를 하나은행 을지로 본점 같은 스마트 오피스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은행장이나 임원들이 별도의 방을 갖지 않기로 했다.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는 이미 은행장실이 따로 없다.
신한생명은 지난 4월 성대규 사장이 취임 후 사무실 옆에 이노베이션센터를 설치했다. 회사 전체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부서인데 사장이 직접 이 사무실을 드나들며 수시로 토론하겠다는 취지다. NH농협은행 이대훈 은행장은 서울 양재동에 있는 핀테크 지원센터인 '디지털혁신캠퍼스'로 일주일에 한 차례 출근한다. 이곳에 출근했을 때 직함도 은행장에서 '디지털 익스플로러(탐험가)'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은행장이 혁신 방안을 챙긴다는 걸 직원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조치다.
"공간만 바꾼다고 보수적인 은행 직원들이 갑자기 혁신가가 되는 건 아니다"라는 지적도 많다. 임원들 사이에서는 "직원들이 매일 옮겨다니니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 보기 어렵고, 지시나 보고를 메신저나 메일로만 해야 하는 게 영 불편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사이 좋은 직원들끼리만 모여 앉거나, 아이디어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직원도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 디지털 담당 임원은 "대단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공간 혁신이 아니라 보수적인 은행들이 관행을 바꿔가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이 강하다"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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