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연구 과제를 발표하느라 최근 주말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런데 주말에 일해야 한다는 불만은 신기하게도 워크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져버렸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행사장에서 바라본 하늘과 산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진정한 '하늘색' 하늘과, 초여름 향기가 나는 공기, 그리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나무들. 몸과 마음이 모두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자연은 아름다운 걸까?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로 가득한 도시는 혐오스럽지만 탁 트인 시야와 아름다운 풍경은 왜 경이로운 걸까?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반응은 타고나는 걸까? 아니면 환경과 교육을 통해 학습되는 걸까?

뱀과 맹수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린 원숭이 역시 맹수와 뱀을 두려워하고, 알을 갓 까고 나온 병아리는 독수리 그림자를 피한다. 반대로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와 동물은 모성애를 자극하고, 여성의 콜라병 몸매는 남성을 유혹한다. 진화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이런 '수퍼노멀 자극'(supernormal stimulus)은 자유의지적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역시 인류의 과거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좋은 것과 싫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차이는 뭘까? 진화적으로 우선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녹색 나무와 풀은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오늘 하루 더 살아남을 확률이 꽤 높음을 예측할 수 있으니 말이다. 파란 하늘은 비에 젖어 내려갈 체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주지만, 어둡고 좁은 시야는 앞으로 어떤 위험에 처할지 걱정하게 한다.

생존에 대한 작은 희망은 이제 '아름다움'이라 부르고, 추함은 죽음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의 최첨단 버전이다. 편한 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순간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도망치고, 발버둥친 과거 생명체들의 희망과 두려움을 다시 한 번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