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컴같은 패스, 지단같은 두뇌 - 폴란드 20세 이하(U-20) 월드컵은 ‘이강인의, 이강인에 의한, 이강인을 위한’ 무대였다.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패스, 여러 명의 상대에게 둘러싸여도 공을 뺏기지 않는 능력은 한국 축구 팬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아직 열여덟. 소년의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강인이 16일(한국 시각) 결승전을 마친 뒤 운동장을 돌며 한국 응원단을 향해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모습.

"막내 형! 여기로 와주세요." "잘했어요. 최고예요." 폴란드 20세 이하(U―20) 월드컵 결승전이 끝나고 두 시간여가 흐른 15일 밤(현지 시각) 우치 스타디움.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늦게 경기장을 빠져나온 이강인(18·발렌시아)에게 팬 100여 명이 몰렸다. 우크라이나에 1대3으로 져 우승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도 이강인은 일일이 팬들과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줬다. 여름밤 모기가 기승이라 쉴 새 없이 얼굴을 흔들어대면서도 팬들과 '셀카'를 찍을 때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강인의 '즉석 사인회'는 대표팀 숙소 로비에서도 이어졌다. 이강인과 한 컷을 찍으려고 '붉은 악마'를 비롯해 결승 상대인 우크라이나 팬들까지 몰려들어 20m가 넘는 긴 줄이 생겼다. 'K I LEE'를 새긴 국가대표 유니폼에 사인을 받은 장석규(39)씨는 "아쉽게 우승을 놓쳐 선수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도 웃으면서 팬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대회 최고 스타는 '칸진 리'

"칸진 리!" 앞선 결승전 시상식에서 대회 MVP인 골든볼 수상자로 이강인 이름이 나왔다. 이강인의 영어 철자가 'Kangin Lee'인데 외국인들은 이를 이어 부르다 보니 '칸진 리'가 된다. 비록 우승컵을 들지 못했지만, 공격 포인트 6개(2골 4도움)를 올리는 맹활약으로 이번 대회 화제의 중심에 섰다.

'칸진 리'는 외신 기자들이 가장 인터뷰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었다. 16강 한·일전이 끝난 뒤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한 일본 기자가 이강인과 인터뷰한 뒤 그 내용을 동료 취재진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 폴란드 기자는 이강인에게 "아는 폴란드 축구 선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강인은 늘 외신 기자 인터뷰까지 마친 뒤 가장 늦게 대표팀 버스에 올랐다.

이번 대회는 이강인의 '쇼케이스' 현장 같았다. 꼬마 시절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해 솜씨를 뽐냈던 '축구 신동'은 열 살 때 발렌시아에 입단해 스페인 1부 리거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내 팬들은 이강인의 실력을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폴란드에서 이강인은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데이비드 베컴을 떠올리게 하는 '택배 패스'는 어김없이 동료에게 정확히 전달됐다. 수비 2~3명이 붙어도 공을 발에 붙인 듯 뺏기지 않는 모습은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안정환 MBC 해설위원은 "물건이 나왔다"며 흥분했다. 다만 막연한 기대는 금물이다. U-20 스타가 성인 무대에서 통하지 않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강인이 현재 같은 활약을 성인 무대로 이어가기 위해선 1군 경험을 착실히 쌓아야 한다. 이강인은 올해 초 발렌시아와 1군 계약을 맺은 후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번 결승전에서 이강인은 잘 쓰는 왼발이 막혀 물러서거나 고립되는 모습을 몇 차례 보였는데,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한 부분이다. 성인들과 겨룰 수 있는 체력도 필요하다.

◇끝까지 형들을 챙긴 막내 형

아르헨티나와 치른 조별 리그 3차전에서 자로 잰 듯한 크로스로 오세훈의 헤딩 골을 도운 이강인은 세네갈을 만난 8강전에선 1골 2도움 맹활약으로 팀을 4강에 이끌었다. 에콰도르와 벌인 준결승전에서도 재치 있는 프리킥으로 최준의 결승골을 만들어냈다. 결승전에선 골키퍼를 완벽히 속이며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지 엘데스마르케는 '이강인은 그 나이대에서 세계 최고 선수'라고 보도했다.

실력과 함께 '막내 형 리더십'이 화제를 모았다. 이강인은 결승전이 끝나고도 낙담한 동료 형들을 일일이 찾아가 어깨를 토닥였다. 8강전 승부차기를 앞두곤 골키퍼 이광연의 얼굴을 잡고 "하면 되잖아. 못 해?" 하며 힘을 실어줬다. 이강인이 이번 대회에서 팬들에게 "애국가를 크게 불러달라"고 부탁하면서 '애국가 열창'은 이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유행이 됐다. 지난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이란과 벌인 A매치에서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애국가를 불렀다.

이강인은 결승전이 끝나고 늘 그렇듯 형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좋은 대회에서 좋은 형들과 좋은 추억을 쌓았다"며 "행복했다"고 했다. 혹시 아쉬움에 울었느냐는 질문엔 의젓하게 답했다. "에이~ 왜 울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후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