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논설위원

한때 중국 황제에 올랐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석 달 만에 끌어내린 건 일본과 맺은 굴욕적인 조약서 한 통이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황제 즉위에 대한 일본 지지를 얻으려고 철도 부설권, 토지 소유권 등을 대거 일본에 넘기는 '5개 항 21개조' 조약에 서명했다. 당시 아편 전쟁 등을 겪은 중국인은 강대국에 섣불리 서명해준 합의문이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지 피눈물로 겪었다. 주권과 국익을 넘긴 21개조 조약에 분노한 민심이 기세등등하던 위안스카이 정권을 삼켜버렸다.

타결이 예상되던 미·중 무역 협상이 막판에 틀어진 건 중국이 '법 개정' 의무를 합의문에 넣어야 한다는 미국 측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 소식통은 "중국은 미국산 수입을 얼마든지 늘리려 했고 (미국이 요구한) 지식재산권 관련 법규도 바꿀 의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 법을 바꾸라는 내용을 합의문에 명시하는 것은 '투항서'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중국 국력의 2~3배인 미국이 사사건건 합의문을 들이밀며 내정에 개입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공산당 지도부가 위안스카이 몰락의 역사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반면 미국은 중국의 '말로만 하는' 약속에 속을 대로 속았다는 입장이다. 미·중이 휴전 합의문을 만드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일수록 '문서'의 중요성을 안다. 언젠가는 상대 발목을 잡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국과 수교하거나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문구를 반드시 넣는다. 덩샤오핑 말대로 1000년 뒤에라도 되찾을 수 있는 근거를 차곡차곡 쌓는 것이다. 2012년부터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지역 대부분을 중국 고유 영토로 표시한 지도를 중국 여권에 넣고 있다. 합의문에 자기 의무는 모호한 말로 흐리고 상대 책임은 명확하게 기록하는 것도 중국 특기 중 하나다.

한반도 주변 4강국은 21세기 패권을 노리는 나라들이다. 우리가 함부로 문서에 서명해줄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중국에 '사드 추가 배치, 미 MD(미사일 방어) 참여, 한·미·일 동맹'을 하지 않겠다는 '3불(不)' 약속을 문서로 해줬다. 지난달 북이 요격이 어려운 '이스칸데르급' 신형 미사일을 두 차례 발사 성공하자 미국에선 한·미 MD 시스템 통합 필요성이 거론됐다. 북 미사일 위협이 현실로 닥친다면 MD 참여보다 더한 것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런 군사 주권이 '사드 3불'로 침해됐다. 당시 홍콩 매체가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안 쏘고 승리했다'고 보도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청와대는 2017년 한·미 정상회담 공동 발표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동맹이 인도·태평양 안보의 핵심 축임을 강조했다'는 문구를 넣었다가 중국 반발이 우려되자 "트럼프가 강조한 것이지 우리가 동의한 건 아니다"라고 얼버무렸다. 수십 발의 핵탄두를 보유한 북과는 재래식 위협만 같은 숫자로 줄이는 군사 합의를 하고 '평화가 왔다'고 선전한다. 북은 그 문서를 들고 우리가 대대급 훈련만 해도 '약속 위반'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이달 오사카 G20 정상회의 전후로 동북아 외교전이 예고돼 있다. 북핵, 사드, 항행의 자유, 인도·태평양 전략, 일대일로, 반(反)화웨이 등을 놓고 다양한 성명과 합의 도출이 시도될 것이다. 문구 하나하나에 우리의 사활적 이해가 걸릴 수 있다. 이 전쟁의 주력 부대인 외교부는 투명 부서 취급을 받다가 지금은 만신창이가 됐다. 북만 바라보고 이념과 환상에 빠진 외교를 하면 또 총 한 발 못 쏘고 패전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