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국가 채무 비율이 45%를 기록할 것"이라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발언에 이어 청와대가 31일 '증세 없는 재정확대' 계획을 밝힌 것은 재정 운용의 기본 원칙을 허물고 정부 곳간을 풀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이나 다름없다.

과거 정부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나라 살림을 최대한 균형 있게 유지하고, 후대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국가 채무 증가를 최소화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국가채무 비율의 마지노선이 40%'라는 불문율도 이런 공감대에서 나왔다. 그러나 "국가채무비율 40%의 근거가 무엇인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로 인해 오랫동안 유지해온 건전 재정 원칙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

공기업 빚 포함땐 국가채무비율 60%

올해 우리나라 국가 채무가 처음으로 40%를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국가 채무 비율을 40%로 지킬 근거가 없으며, 40%가 넘더라도 재정 건전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은 2010년 작성한 '선진국 및 신흥국의 세입·세출 정책' 보고서에서 선진국은 GDP 대비 60%, 신흥국은 40%를 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성을 제시한 바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가 채무에는 수백조원에 달하는 공기업 부채가 빠져 있다는 함정이 있다. 공기업이 일찍이 민영화돼 공기업 부채 부담이 적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공기업 부채까지 포함할 경우 이미 국가 채무 비율이 60%를 넘는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정부는 공기업 부채를 포함한 채무 비율을 국민에게 알리고 훨씬 타이트하게 재정 건전성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인건비와 복지 지출 등 경직성 지출이 해마다 크게 늘어나는 상황이라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 증가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여기에 저성장과 고령화까지 고려하면 일본처럼 채무 비율(2018년 기준 234%)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한국 같은 경제 환경에서 국가 채무 비율이 급등하면 국제 신용등급 추락 등 재앙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인실 한국경제학회장은 "국가 채무가 100%를 넘어가는 선진국도 있지만, 이런 나라들은 대부분 기축 통화국이기 때문에 외환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낮다"며 "경제 발전 단계나 재정 구조, 고령화 수준 등이 국가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OECD 국가들과 직접 비교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누더기된 국가 재정 운용계획

건전 재정 원칙이 허물어질 조짐은 현 정부 들어 매년 큰 폭으로 수정되는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해마다 기획재정부가 작성하는 국가재정운용계획은 향후 5년간 국가 재정의 기본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서는 국가 재정 운용계획이 지키지 못할 허망한 약속처럼 취급되고 있다. 정부는 2018년 예산을 7% 늘리며 "향후 5년간 재정 지출 증가율을 연평균 5.8%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 해 아무렇지도 않게 전년보다 9.5% 늘어난 '초수퍼 예산'을 편성했다.

여기에 정부는 해마다 국가 재정 운용계획을 대폭 수정해가며 미래의 지출 계획을 늘려오고 있었다. 가령 2020년 재정 지출 규모를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엔 443조원으로 계획했으나, 정권이 바뀐 2017년엔 476조원으로 늘려 잡았고, 2018년에는 504조원으로 한층 더 늘렸다. 2020년 관리 재정 수지 적자 규모도 20조4000억원(2016년 계획)→38조4000억원(2017년 계획)→44조5000억원(2018년 계획)으로 대폭 늘렸다.

이런 상황에서 홍 부총리의 "2022년 국가 채무 45%" 발언이 나오면서 오는 8월 나올 '2019~2023년 국가 재정 운용계획'이 또 한 번 큰 폭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서울대 경제학부 안동현 교수는 "증세 없는 재정 확대를 하려면 대규모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수밖에 없다"며 "안 그래도 국민연금 재정 부담 등을 떠안게 될 미래 세대에 또 다른 부담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