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 여행문화전문기자

강원도 화천에 있는 파로호(破虜湖)는 1951년 6·25전쟁 때 국군과 UN 연합군이 중공군을 전멸시킨 전투 현장이다. 그해 5월 26일부터 사흘 동안 2만명이 넘는 중공군이 호수에 수장돼 호수 물이 시뻘겋게 됐다는 말이 전한다. 전후 이승만 대통령은 파로호를 방문해 호수 이름을 '오랑캐[虜]'를 '쳐부순[破]' 호수로 명명하고 휘호를 남겼다. 그 기념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전투 때 희생된 국군 장병을 기리는 가곡이 '비목(碑木)'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강원도는 이 파로호 이름을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변경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중국 외교부와 중국 관광객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원도는 새로운 호수명으로 '원래 이름'인 '대붕호(大鵬湖)'라는 명칭을 검토 중이다. '남북강원도협력협회'라는 단체도 "비극의 호수를 세계적인 평화와 상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파로호 이름 바꾸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 주말 '2019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라는 지역 축제를 개최했다. 평화문화제 공식 블로그는 "비극이 더 끔찍한 이유는 문명국의 정규군이 상대국 병사들 사체를 호수에 수장해버렸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이유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첫째, 지명에 담긴 역사를 시멘트로 발라버리겠다는 발상이다. 땅 이름은 역사다. 파로호라는 이름에 담긴 역사가 지워야 할 역사인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불순하다. 더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둘째, '원래 이름'이 대붕호라는 주장의 어리석음이다. 파로호는 1944년 조선전업주식회사가 화천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만든 '인공 호수'다. 그때 이름이 '대명제(大䳟堤)'였다. '명(䳟)'은 민물에서 사는 전설 속 큰 새다. 작명 시기는 일제강점기, 작명가는 일본 기업이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그 어떤 고지도에도 대붕호라는 지명이나 지형지물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호수 자체가 없었는데 무슨 원래 이름이 있다는 말인가.

셋째, 이 정권이 스스로 폭로해버린 사대(事大) 근성이 어리석다. 보도에 따르면 개명 논의가 시작된 곳은 베이징이고, 주인공은 노영민 전(前) 주중 대사다. 노 전 대사는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KBS 특파원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겨울 노 대사가 특파원에게 비보도를 조건으로 파로호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올 초 노 대사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됐고,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강원도는 올해 파로호 개명을 검토하고 있다.

노 전 대사가 부임 초기 베이징 외교가에 인사를 다니며 써준 글은 '萬折必東(만절필동)'이었다. '황하가 만 번 구부러져도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얼핏 굽히지 않는 기개와 절의로 읽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뜻한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살려준 명나라에 끝까지 충성하겠다"며 이 넉 자를 썼고, 장기 집권한 노론 또한 명 멸망 후에도 같은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절의를 뜻한다고 우기는 사람은 충북 화양계곡에 가보기 바란다. 노론이 명나라 황제를 섬기려고 이곳에 만든 사당 이름이 '만동묘(萬東廟)'다. 그 옆 등산로 절벽에는 선조 친필로 '萬折必東' 넉 자를 새겨놓았다. 노영민 실장은 꼭 가보기 바란다.

충성을 맹세하는 대한민국 대사에게 중국이 무슨 요청인들 못 했겠는가. 중국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전쟁기념관(抗美援朝戰爭紀念館)' 이름을 바꿔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전무(全無)한 역사 인식과 고전에 대한 천박한 지식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런 지식과 의식으로 외교와 내치(內治)를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