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인 한국 여성과 결혼한 것이 내가 낙천주의자란 증거"
"통일은 돈 이상의 가치, 젊은이들 의지가 가장 중요"
"진정한 리더? 국가를 위해 선거 패배 리스크 감당해야"
"'하르츠 노동시장 개혁' 당시 독일 상황과 한국은 달라"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 전 독일 총리. 슈뢰더는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변호사가 된 뒤 진보 성향의 실용주의 정치인이 됐다. 이번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통일 독일의 지혜를 나눠주었다.

독일 사민당의 원로 정치인이자 슈뢰더의 멘토였던 애르하르트 에플러는 슈뢰더를 ‘정치적 동물’이라고 불렀다. 2018년 10월 이후, 통역사 김소연 씨와 결혼한 그를 한국인들은 ‘슈서방'으로 부른다. 조선일보 주최로 열린 제10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ALC) 참석차 서울에 온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를 만났다. 자석처럼 붙어 그의 곁을 지키는 아내 김소연 씨와 함께였다.

그는 인터뷰에 앞선 대담 세션에서 로타어 데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와 함께 ‘독일 통일의 경험과 교훈'을 주제로 진지한 견해를 펼쳤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동독에서 밀어낸 것이며, 소련 붕괴와 고르바쵸프의 유연성이 결정적 해머가 됐다는 것.

슈뢰더 전 총리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통일 독일을 이끌었다. 동서독은 경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일 직후 화폐를 1:1로 교환했으며, 연금 등 사회보장제도와 기본법을 공유했다. 서독 경제가 탄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독인들은 서독의 공산품에 열광했고 서독인들은 동독에 투자해 인프라와 제조업을 키웠다. 한동안 경제 붐이 일어나고 통일의 열매를 누렸으나, 이후 후유증으로 500만 실업자가 양산됐다.

슈뢰더는 노동 유연화와 연금 개혁 등을 담은 ‘어젠다2010’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계층의 반발로 사민당은 실각했다. 경제 개혁의 열매는 다음 정권에서 따먹었다.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독일 경제는 부활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취임 후 첫 의회 연설에서 "어젠다2010으로 새시대의 문을 열게 해준 전인 슈뢰더 총리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오늘날 독일이 유럽의 리더로 부상한 것은 슈뢰더의 용기있고 과감한 개혁 덕분’이라고 평했다.

슈뢰더는 75살이라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에너제틱한 모습으로 인터뷰 자리에 나타났다. 질문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정무적 감각을 유연하게 발휘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석회색 눈동자는 은퇴한 올드보이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희망적인 청년의 눈빛이었다.

-최근에 ‘지적인 낙관주의자'라는 책을 쓴 옌스 바이드너라는 독일 철학자를 인터뷰했습니다. 그가 자신이 아는 가장 우아한 낙관주의자는 슈뢰더 전 총리라고 하더군요. 당신은 낙관주의자입니까?

"(미소 지으며)맞아요. 저는 낙관주의자예요. 독일 전 대통령인 요하네스 라우가 한 말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성공과 사랑에 빠져야지, 실패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낙관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행복과 독일의 번영에 영향을 미쳤나요?

"낙천주의자인 저는 한국 여성 김소연과 결혼하면서 사랑에 성공했어요(슈뢰더는 75세, 김소연은 48세로 부부는 27살의 나이 차를 극복했다). 제 아내가 독일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그러더군요. 남편은 시시포스 같은 사람이라고. 시시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돌을 굴리며 언덕을 오르죠. 돌이 정상에서 굴러떨어져도 지치지 않고 다시 돌을 굴려 올라갑니다."

-저는 그 시지포스의 운명을 끝나지 않는 형벌로 해석했습니다만.

"아니요. 시시포스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실패해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점에서요. 시시포스도 낙천주의자, 저도 낙천주의자죠. 그게 아니라면 분단을 경험한 제가 어떻게 다시 분단국가인 한국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겠어요? 하하."

슈뢰더는 한국에서 ‘슈서방'이라는 친근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가 화통한 웃음을 터뜨렸다. 분단국가였던 독일이 통일되고, 그 통합의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 독일을 ‘유럽의 환자’에서 ‘유럽의 승자’로 끌어올린 장본인. 정작, 슈뢰더와 사민당은 정치적으로 참패했지만 독일은 승리하게 된 그 과정을 세계정치사는 ‘눈부신 패배' ‘리더십의 교본'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분의 결합처럼 한국의 통일도 낙관적으로 보는지요?

"(신중한 미소를 띠며)네. 한국은 통일이 될겁니다. 중요한 건 당신을 포함해 젊은 세대들의 의지예요. 통일이 가져올 비용, 혹은 부의 증대... 모든 걸 나눠야해요. 통일은 돈 이상의 가치입니다. 문화적 통합이고 원래 하나였던 민족이 한 몸으로 회복되는 과정이죠. 그런 국가의 결속을 돈으로만 환산하면 안 됩니다. 더불어 통일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평화가 곧 세계 평화로 이어진다는 사명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그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통일 독일을 이끈 리더로서 현재 북한의 ‘핵'을 두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트럼프, 김정은, 문재인… 리더들이 최우선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일단 저를 비롯한 유럽인들은 한국이 갈등의 평화로운 해법을 시도한 것 자체를 기쁘게 생각해요. 갈등 해결의 첫 단계는 당연히 북한의 핵 탄도미사일 포기지요. 그다음엔 미국, 중국, 러시아… 주변 강대국들의 경제 제재 완화 및 공조일 거예요. 일단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큰 걸음을 뗐습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관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변수예요.

얼마 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적지 않아요. 상황이 이러하니 남한의 역할이 더 막중해졌습니다. 강대국과 북한을 상대로 좀 더 다이내믹한 프로세스를 만들어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중간단계로 개성경제특구를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물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사일 발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있습니다. 사실, 이 프로세스는 장기전이에요. 저는 이 과정에서 문재인과 김정은, 두 리더의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멈추면 안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리더의 혜안과 결단이 중요한 시기지요. 당신의 자서전을 감명깊게 읽었어요. 한국판 자서전의 부제는 ‘문명 국가로의 귀환'이지만 원제는 ‘결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 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책임’을 지는가가 정치인의 전부라고 느껴졌어요. 통일 독일의 개혁 리더로 당신이 했던 최고의 결정 3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미소 지으며)제가 총리로 일했던 1998년부터 2005년은 매일 결정의 연속이었어요. 습관적인 것도 있고, 관료들이 올리는 서류에 형식적으로 사인만 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재임 기간 중 몇 가지는 정말 중요한 역사적 결단이었어요.

첫째, 이라크 참전 반대를 결정한 것. 당시 그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도 높았지만, 독일 내부에서의 반대도 컸습니다. 둘째, 통일의 후유증으로 경제가 낙후했던 2003년 즈음, 과감하게 ‘어젠다2010’ 개혁 조치를 단행한 거죠. 세 번째는 독일이 주도적으로 유럽연합에 동구권을 참여시킨 겁니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의 국가를 유럽연합 안으로 끌어들인 건 총리 재임 시절에 중요한 의사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슈뢰더는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기 위해 1년이나 앞당겨 실시한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해 총리직을 내놔야했다. ‘정치적 자살’의 결실은 후임인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보게 됐다.

-물론 그에 따른 책임도 졌지요?

"당연합니다. ‘어젠다2010’ 개혁 정책으로 저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됐어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제게 정치 리더십에 관해 물어보는 분들이 많더군요(웃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지요(웃음). 정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요?

"저에게 정치 리더십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비록 자기가 선거에서 패배할 리스크가 있어도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정치인으로서의 나 개인이나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과업을 우선시하는 거죠."

-국가개혁안 ‘어젠다 2010’(일명 하르츠 개혁)은 주요 지지층이던 노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사회복지 비용을 절감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요즘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 성장을 비판하며 슈뢰더를 벤치마킹하라는 의견도 있더군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의 한국 상황과 독일의 당시 상황은 달라요. 전직 총리로 국내 정치에 조언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외부자는 혼란을 부추기죠. 다만 제 개혁 정책의 골자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가진 여유를 R&D와 직업교육에 재투자했다는 거예요. 복지시스템 유보가 아닌 강화를 위해 쓰였지요. 어떤 경우든 독일 모델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할수는 없습니다. 한국 경제가 가진 구조적 문제와 해법은 대통령과 국회가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한편으론 ‘어젠다2010’으로 실업률이 줄고 독일 경제가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워킹푸어’가 양산되면서 고용의 질이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런 주장은 근거가 없습니다. 독일 연방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워킹푸어는 줄고 있어요. 정상적인 노동자 비율은 그 뒤로 확실히 늘었습니다."

슈뢰더 정부는 1998년 연방총선에서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으로 탄생했다. 독일 연방정부 최초의 적록(赤綠)연정이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한계를 지평선 너머로 확장하려고 노력해왔다고 했다.

정파적 이익을 뛰어넘어 국익을 위한 선택한 슈뢰더의 결정은 ‘역사 앞에 부끄럽지 말자’는 의식의 흐름에서 나왔다. 그는 2001년 6월 15일 100억 마르크의 기금으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나치 정권 아래서 희생된 160만 명에 대한 손해배상 지급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각각 50억 마르크를 마련해 설립한 재단이었다.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태도는 세계인들에게 독일의 도덕적 위상을 세우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당신이 내세운 ‘문명국가'라는 화두는 어떻게 형성된 거죠?

"총리 시절에 작가, 예술가, 문화인들과 토론하면서 구체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역사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총체적으로 봐야 해요. 역사적 과오에 젊은이들은 죄가 없어도, 그들의 조상이 지은 죄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고, 설사 그 시기에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도 벌어진 ‘사실’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역사는 그들에게 죄는 묻지 않아도 책임은 물을 수 있어요. 한국에도 그런 예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 이야기를 꺼냈다. 슈뢰더는 2017년 가을, 외국의 유력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전범 국가의 전 총리로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난 감회가 남달랐을듯 합니다.

"제가 놀랐던 건 그분들의 마음에 한 줌의 증오심도 없다는 거였어요.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일본 정치인들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감 있게 사과하는 것뿐. 물질적 보상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문명국가라면, 그 국가의 국민이라면, 역사에 책임을 느껴야 해요. 확신하건대,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한국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볼 것을 권했다. 영화 후반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로 분한 배우 나문희의 유엔 연설 장면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설명하며. "오! 저는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어떤 강요도 없었지만(웃음), 저는 아내 김소연 씨에게 한국 역사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자서전에서 저는 당신이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술한 부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였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깊고, 그것이 당신의 세계관에 깊숙이 투영됐다고 느꼈어요.

"맞습니다. 저는 가난했지만, 행복한 유년을 보냈어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았고, 자유롭게 풀어두셨어요. 매를 맞은 기억도 없고 오직 사랑만 받았지요.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어요. 절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전쟁터에서 전사하셨어요."

1941년 벨기에로 파병된 아버지 프리츠 슈뢰더의 모습.

-생부의 무덤을 찾아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 일은 저의 총리 재임 시절(2004년)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총리여서 누린 특권이었지요(웃음). 아버지는 10명의 전사자와 루마니아의 작은 시골 마을에 묻혀있었어요. 러시아 전쟁에서 퇴각하다 전사하셨죠. 당시 루마니아 정부가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가도록 배려해줬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골을 헤쳐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온당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마지막을 함께 했던 10분의 전사자들과 루마니아의 소박한 군인묘지에 있습니다. "

-42년 정치 인생 중에 가장 충만했던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느낀 순간이죠. 저는 부모가 얼마만큼의 부를 가졌느냐에 상관없이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주고 싶었어요. 니더작센주 총리로 있던 시절, 무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가슴 벅찬 일이었습니다."

1986년 니더작센주 총리 후보 선거전을 치르는 젊은 슈뢰더.

그 자신,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 중학교 졸업 후에 철물점 점원으로 일했다. 이후 야간학교에 다니며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했고,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76년 하노버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슈뢰더는 무상 교육을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불편한 상황이 개선되도록 도울 때 정치인으로 사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연방 총리 시절, 차별금지 조치를 단행한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정치적 결단이 옳았다고 느낄 때도 있죠. 저는 이라크전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했고,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는 게)사실로 증명됐어요. 젊은이들의 희생을 막은 건 감사한 일입니다."

2000년 슈뢰더와 어머니 에리카 포슬러.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신뢰 전문가’ 데이비드 데스테노는 정치인들이 장기이익이 아닌 단기이익에 집중하기 때문에 가장 못 믿을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그 모델을 거스른 보기 드문 리더가 아닌가 합니다. 그 용기의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절실함입니다. 독일의 장래가 달린 문제였어요. 어떻게 개혁할지 자문과 소통을 충실히 했지만, 결단은 내가 내려야 했어요. 저는 제가 밀어부친 ‘어젠다 2010’으로 노동자 지지층의 강한 저항에 부딪힐 거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그만큼 절실했기에 패배의 리스크를 떠안기로 결정한 거죠."

-어찌보면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별명이 매우 적절하군요. 재임 시절보다 은퇴 후 독일 경제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후한 평가를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웃음).

"하하. 동의합니다. 저는 인생에 걸쳐 제가 옳다고 결정한 것에 후회가 없어요. 실각했지만, 행복한 정치인이었고 퇴임 이후에 더 행복한 인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역은 아니어도 저는 여전히 정치적인 동물로 살고 있어요."

-스스로 가진 영향력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아니요. 저는 내부 정치에 간섭하지 않아요. 총리직에서 내려왔어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에요. 정치는 뭐랄까, 제게 잘 맞는 오래된 코트죠."

오래된 코트라는 표현을 한 후, 맘에 드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며 통일 독일을 정비하고 능숙한 외교전을 펼쳤던 유럽의 거물 정치인이 ‘빈손'을 보여주며 여유를 드러냈다.

슈뢰더를 지지하는 예술가와 지식인들. 전 총리 빌리 브란트(가운데)와 작가 귄터 그라스(오른쪽)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지요? 작가이자 비평가인 귄터 그라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압니다.

"제가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람 대부분이 예술가입니다. 작가인 귄터 그라스, 화가인 안젤름 키퍼 등등. 저는 제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들에게 감탄해요. 제 한계의 지평을 확장해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각 나라의 문화예술인들은 소중합니다. 지금은 아내를 통해 한국의 문화예술을 배우고 있어요."

슈뢰더와 김소연은 2018년 가을, 한국과 독일에서 두 차례 결혼식을 올렸다. 450명의 하객 앞에서 4시간 동안 펼쳐진 한국의 결혼식장엔 그들만의 댄스플로어와 3개의 동시통역 부스가 마련됐다. 김소연은 슈뢰더에게 ‘My way'를 개사한 ‘Our way’라는 시를 낭독했고, 슈뢰더는 김소연을 높이 들어 안은 채 20m를 행진했다. 하객으로 참석한 지인은 김소연이 4시간 짜리 성대한 공연의 지휘자 같았다고 전했다.

한때는 ‘슈뢰더의 입’으로, 지금은 인생의 동지로, 나란히 앉아있는 그들에게서 사랑과 존경과 신뢰의 공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김소연은 현재 동시통역사이면서 동시에 9년째 독일 NRW 연방주 경제개발공사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그녀는 결혼 이후엔 하노버 집무실과 베를린, 한국을 오가며 8,300km의 장거리 출퇴근 중이다.

슈뢰더와 그의 아내이자 동시통역사인 김소연. 모든 공식 행사에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닌다.

-아내인 김소연 씨와 당신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통역하는 김소연을 바라보며)저는 제 아내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그녀가 굉장히 독립적이라는 겁니다. 그녀는 정말 당당해요. 각자 독립적인 상태여서 우리는 서로를 돕는 파트너십을 잘 발휘할 수 있죠. (힘을 주며)우리부부는 동등하며, 소연의 내적인 독립성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죠."

김소연은 남편 슈뢰더가 자신에게 보내는 헌사를 건조하고 정확한 어휘로 통역했다. 마치 모르는 어떤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듯.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흑발의 긴 머리, 짙은 속눈썹, 초록색의 맞춤 수트가 그녀를 더욱더 빈틈없는 프로페셔널로 보이게 만들었다.

김소연에게 물었다.

독일 잡지에 등장한 슈뢰더 커플.

-슈뢰더의 어떤 점이 당신을 사로잡았나요?

"(주저함 없이)그는 좌절에서 힘을 얻는 사람이에요. 포기라는 게 없죠. 독일 언론과도 얘기했지만, 제 남편은 낙천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시시포스예요. 타고난 성격과 기운도 있지만, 평생에 걸쳐 그런 결단을 해온 남편의 용기에 감동했어요. 저는 정치인도 아니고 심지어 정치인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와 별개로 ‘이 사람 말이라면 100% 믿을 수 있다'는 친구가 한명쯤 있으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요(웃음)?"

김소연의 코멘트가 길어지자 슈뢰더는 답답하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들은 서로가 앞다퉈 자신이 행운아라고 했다. 통일 독일의 전 총리와 분단국가의 독립적인 여성이 만나 이룬 가정은 말할 수 없이 버라이어티하다며. 정치적 현안을 이야기할 때는 눈에 불을 뿜었으나 서로를 쳐다볼 땐 순식간에 로맨틱해졌다.

-노년의 나이에 그 버라이어티함을 수용하는 게 버겁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더할 나위 없이 큰 행운이지요. 그동안 여러나라를 다니며 경험했지만 한국만큼 열정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발전하는 나라는 드물었어요. 한국은 미래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그만큼 여러 도전을 받고 있어요. 아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대해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어요. 그런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배우가 될 생각은 안해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랬으면 좀더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통일 독일을 이끈 수장으로 이 시점의 한국의 정치 리더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강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라는 걸 잊지 마세요. 강력한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경제 대국의 리더로서 정치인은 국민에게 사회적 안전을 제공해야 합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일관된 태도를 보여줄 때 국민은 안정감을 갖고 한반도의 성장을 함께 도모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길은 세계 평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