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에 집착하는 한국 사람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손에 꼽히는 '범죄도시' 나폴리를 기어코 간 이유는 간단했다. 나폴리에서 피자의 역사가 시작됐고, 그곳에 세계 최고라고 흔히들 말하는(영화에 나온 것은 물론 뉴욕타임스 기자도 다녀갔다) 피자가게 '다 미켈레(Da Michele)'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 들끓는 뒷골목도, 가게 앞 긴 줄도 나를 막지 못했다. 마침내 비닐을 깐 테이블에 앉아 이탈리아 삼색 국기를 닮은 마르게리타와 마늘, 토마토, 오레가노로 맛을 낸 '마리나라' 피자를 뜯어 먹었다. 맛은 물론 뛰어났다(5분 만에 두 판을 먹었다). 그러나 이른바 '정통 나폴리 피자협회(AVPN)'에서 이 맛을 지켜야 한다며 벽돌 화덕에서 장작을 쓸 것 등 여러 규칙에 따라 인증 마크까지 발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살짝 갸우뚱해진다. 본래 기름과 소금만 쳐서 구워 먹던 납작한 빵이 피자의 시작이었다. 심오한 철학이 있어 간단한 재료를 쓴 것이 아니라 당시엔 정말 먹을 게 밀가루, 토마토, 허브 정도였을 것이다. 원조도, 오리지널도 좋지만 전통의 수호자처럼 엄숙한 얼굴로 피자를 받들고 싶지는 않다. 대신 손으로 툭 뜯어 입에 욱여 넣고 콜라나 맥주 같은 것을 붓고 싶다. 그럴 땐 반항아처럼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올려 구운 미국식 피자가 제격이다.

들어 올려도 형태를 유지하는 바삭한 피자 도우 위에 빨간 페퍼로니 햄을 촘촘히 올린 ‘피제리아호키포키’의 페퍼로니 피자. 바다 건너 흘러들어온 모든 것을 용광로처럼 녹여내리는 ‘미국적 맛’의 집합체다.

서울 이태원 '매덕스 피자'는 이름부터 미국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피자는 조각과 판으로 각각 주문이 가능하다. 선택 장애가 있는 이라면 모든 메뉴(9가지)를 시켜 서로 다른 조각 피자로 한 판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우등생처럼 선택과 집중을 한다면 '맥앤치즈'와 '초리소' 피자가 상위권에 올라간다. 짜고 기름진 맛이 얇고 바삭한 도우 위에 촘촘히 박혀 있어 '완판'을 하려면 콜라나 맥주의 도움이 필수다. 미식축구 같은 것을 보며 영어 욕도 몇 마디 해야 더 먹는 맛이 오를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홍익대 앞에 본점이 있는 '피자네버슬립스(Pizza Never Sleeps)'는 가게 이름과 달리 오후 3시(주말은 1시)부터 오전 2시까지만 영업을 하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이곳에 가면 더블페퍼로니와 포테이토 피자를 먹어봐야 한다. 기왓장처럼 겹겹이 쌓인 페퍼로니 토핑은 시각적 충격을 준다. 프렌치프라이(감자튀김)가 수북이 올라간 포테이토 피자는 살짝 괴팍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매콤하고 달고 짠 이 집 피자를 먹노라면 괜히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팝송이라도 한 곡 뽑고 싶어진다. 반면 서초동 남부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조용한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피제리아호키포키'는 조금 더 단정하고 깔끔하다. 미국에서 피자를 배웠다는 주인장 혼자 주방을 보기에 음식 나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주인장이 도련님처럼 하얀 얼굴 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 판 한 판 구워낸 피자는 기다린 값을 한다. 미국 포틀랜드풍이라는 이곳의 메뉴 중 '화이트 할라피뇨'는 미국식 피자 하면 으레 떠올리는 짜고 기름진 진한 맛이 없다. 2~3인용이란 안내가 붙은 16인치 피자 한 판 위에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 모차렐라 치즈, 여기에 고소하고 산미가 살짝 느껴지는 리코타 치즈가 올라 있고 시원한 허브향이 풍기는 소시지, 살짝 매콤한 할리피뇨가 점점이 박혀 있다. 첫 맛은 덤덤한데 한 조각을 먹고 나면 합이 잘 맞는 대화처럼 다음 조각으로 자연스레 손이 간다. 꿀에 고추, 식초를 넣어 끓였다는 '매운 꿀 드리즐(소스의 일종)'을 살살 뿌려 먹으니 고급스러운 유머가 곁들여진 영어 신문 칼럼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래 과격한 맛이 본류인 페퍼로니 피자마저도 이 집 것은 하얀 셔츠 단추 두 개 푸는 정도에서 멈췄다. 정중동(靜中動)의 맛을 지키는 골조는 곧지만 바삭하게 씹히는 도우에 있었다. 살짝 그을리게 구워 구수한 풍미를 살린 도우를 앞니로 툭 하고 끊어 먹었다. 오래된 도시와 사람이 녹아든 지중해의 진한 짠맛은 없었다. 대신 태평양 먼바다에서 불어온 상쾌하고 담백한 바람이 불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품이 넓은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