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보운 사회부 기자

올해 대학을 수료하고 맹렬히 취업 준비 중인 A(27)씨는 자격증이 12개다.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유명 공모전에도 여러 번 입상했다. 토익 점수가 만점에 가까운 그는 최근 일주일간 미국 월가(街)를 다녀왔다. 탐방 목적은 금융 시장의 신기술. 하지만 정작 충격을 받은 건 동갑내기 미국 친구의 이야기였다.

A씨는 미국 대학생에게 "곧 졸업인데 취업 준비는 잘돼 가?" "취업에 도움 되는 경력 관리는 어떻게 해?" 등을 물었다. 그랬더니 미국 친구는 "취업해서 내가 가진 호기심과 문제의식을 어떻게 회사에 접목할지 계획을 짜고 있다"고 했다. A씨는 '취업 준비'에 대해 물었는데, 미국 친구는 '취업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한참을 겉돈 뒤 A씨가 답답해서 쐐기를 박듯 물었다. "그런데 취업이 안 되면 어쩌려고?" 그러자 돌아온 답. "미스터 A, 이런 고민 없이 덜컥 취업이 되면 어쩌려고?"

기자는 지난 2월부터 청년 100명을 뽑아 세계 각지로 보내는 본지 프로젝트 '청년 미래탐험대 100'을 담당하고 있어 20대를 자주 접한다.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에게 느낀 점을 물었더니, 공통되는 말이 있다. "우리 20대에게 취업은 종착점이지만 미국·유럽의 20대에겐 출발점이었어요."

얼마 전 출장 일정을 놓고 불만을 쏟아낸 한 청년이 떠올랐다. 20대 후반의 그도 취업 준비생이다. 당초 3월 전후로 출국하려 했으나 섭외가 부족해 탐험 시기가 연기됐다. 그러자 이렇게 하소연했다. "여름에 가면 상반기 취업 지원 서류에 이 경력을 쓰지 못하는데, 그럼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이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청년들이 꾹꾹 눌러 쓴 자기소개서를 읽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 A4 용지로 2000장 분량이었다. 과연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었지만 실제 만나보면 하나같이 불안해했다. "아무리 쌓여도 제 스펙이 미덥지 않아요. '취업에 도움이 안 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건너편에 '취업 이후의 내 전문성'에 일절 도움이 안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죠." 명문대에 재학 중인 한 탐험대원은 "주변 친구들이 대기업 인·적성 시험에 대비해 '접은 종이에 구멍 뚫고 펼쳤을 때 어떤 모양일까'라는 문제를 풀고 있을 때, 런던에서는 '각자의 호기심을 세상에 어떻게 내놓을지' 고민하고 있더군요"라고 했다.

취업을 '인생의 결승선'이라 생각하는 우리와 '인생의 출발선'이라 생각하는 저들이 경쟁하면 누가 이길까. 우리 청년들도 이런 현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한 청년의 말이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열정은 우리도 밀리지 않아요. 다만 선진국에선 사회 전체가 청년들의 열정이 함부로 낭비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거죠. 그게 제일 부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