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만든 세계|마틴 푸크너 지음|최파일 옮김|까치|472쪽|2만5000원

1968년 12월 지구를 떠난 아폴로 8호가 달 주위를 돌아 다시 지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우주비행사들은 창밖으로 지구가 떠오르는 장면에 매료됐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우주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던 인류에게 '지구돋이'의 장관을 본 소감을 들려주기 위해 우주인들은 미리 준비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구약의 창세기였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앙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폴로 8호 우주인들은 불가해한 우주의 신비를 표현할 수단이 필요했고, 성서는 인류가 그 바탕 위에서 수많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창조하고 문화를 피워낸 강력한 소스 코드, 즉 근본 텍스트 중 하나였다.

근본 텍스트는 인류가 세계를 보는 관점을 형성하고 우리의 행동에 간여하는 문서다. 성경, 코란, 불경 같은 경전뿐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의 위대한 문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옛 소련의 근본 텍스트는 '공산당선언'이다. 소련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나는 열심히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신을 보지는 못했다"고 말한 바탕에도 공산당선언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소가 벌인 냉전은 근본 텍스트 간에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1770년쯤).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 푸크너는 지금의 세상을 만드는 데 이야기와 글이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인류가 쓰고 읽은 텍스트 16개를 선정한 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오가며 글이 세상을 바꾼 마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방 원정으로 이끈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였다. 왕은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했고, 스스로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었다. 그는 모든 원정길에 '일리아스'를 지니고 다녔다. 그 후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은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으며 그리스어를 배우고 알파벳을 익혔다. 호메로스 서사시는 헬레니즘 문명을 잉태하고 키운 근본 텍스트였던 것이다.

근본 텍스트의 이면엔 서기(書記)들의 활약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제사장이라기보다 서기에 가까웠다고 저자는 말한다. 에스라는 이민족과 섞여 신앙심을 잃은 동포들을 모아 그 앞에서 모세 5경을 낭독했고, 이를 기록해 경전으로 확립했다. 수메르 문명의 이야기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기록한 이는 문자에 주술적 힘이 있다고 믿었던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었다. 그는 쐐기문자를 써서 수많은 점토판에 수메르 문명의 방대한 지식을 담았다. 그 점토판들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범람할 때마다 뭉개져 진흙으로 돌아갔지만, 수도 니네베에 보관됐던 점토판들은 왕국이 멸망해 불에 탈 때 도자기처럼 구워진 덕분에 오히려 수천년을 버텨 현대인과 조우했다.

고대 이집트의 서기 학교 풍경을 새긴 부조. 당시 서기는 들판에서 고되게 일해도 되지 않는 혜택받은 관료였다.

알라딘과 알리바바 이야기가 탄생한 사연도 흥미롭다. 번역된 '천일야화'를 읽고 매료된 프랑스 독자들이 "또 없느냐?"고 아우성쳤다. 두 이야기는 번역자가 새로운 이야기꾼을 찾아나선 끝에 시리아에서 한나 디야르라는 청년을 만나 듣고 추가한 것으로, 아랍이나 오스만 원본에는 없던 것들이다.

지난 세기 세계를 만든 가장 강력한 글은 공산당 선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카스트로는 1952년 이 글을 접한 뒤 "결코 잊지 못할 말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공산당 선언이 근본 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현상의 기원을 들려주고, 인류의 스승들을 흉내 내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아주 신성한 정치적 지향성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이 근본 텍스트가 되길 바라며 무려 1240만 부나 찍었지만 역사상 가장 팔리지 않은 책이 되고 말았다. 히틀러 특유의 장광설은 근본 텍스트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였다. 마오쩌둥은 근본 텍스트의 특징을 간파했다. 성찰적인 메시지를 간결한 인용구로 제시한 그의 어록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 손에 들리며 폭력의 경전이 됐다. 저자는 '논어', '금강경', '겐지 이야기', '돈키호테', '마르틴 루터의 95개 반박문' 등이 잉태된 현장을 찾아가고 이 문서들이 타 문명을 자극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이야기도 들려준다. 인류의 지성사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저자의 솜씨에 매혹되며 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