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율리 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는 '의학계의 법전'인 국제질병분류 중 성격장애 총괄팀으로 참여했다. 김 교수는 "타고난 재능은 없다. 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라고 했다.

병(病)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세웠을까. 똑같이 배가 아픈데 이건 왜 장염이고 저건 왜 단순 배탈인가.

세계보건기구(WHO)가 발간한 '국제질병분류'가 의사들의 모범 답안이다. 모든 질병 및 사망의 표준 분류법이 그 안에 있다. 전 세계 120여 국의 사망 및 질병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석학으로 인정받은 의사들이 10년 넘게 논의한다. WHO는 지난해 11차 개정판을 공포했다. 28년 만의 개정이다.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48) 교수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정신 질환 분야에서는 한국인 최초고, 다른 질환 분야로 범위를 넓혀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번 개정판에 따르면 인류의 질환은 25개로 분류한다. 소화기, 호흡기 등 내적 질환과 근골격계, 피부를 포함한 외적 질환 등이다. 정신 질환도 이 중 한 갈래다. 이 25개 질환을 다시 부위별로 나눈다. 소화기 질환은 식도와 맹장 같은 기관으로, 근골격계 질환은 무릎 관절과 척추 등 약 130개로 구분한다.

그 아래 세세한 장애, 증후군은 3만여 개에 다다른다. 김 교수는 130개 분류 중 하나인 '성격 장애(Personality Disorder)'를 총괄했다.

기준이 바뀌어 정신 질환자도 줄 것

이전의 WHO 분류에 따른 '성격 장애'는 아시아권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2002년 발표된 논문 '한국 20세 남자 일반인의 인격장애 유병률에 관한 연구'는 20대 한국 남성의 44.7%가 성격 장애를 앓는 것으로 봤다. 김 교수는 이를 한국 예절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서양식 시선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대표적인 예로 회피성 성격 장애를 보자. 이전 분류법에서는 '부담스러워도 표현하지 못한다' 같은 문항을 물어봤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직설적인 거절이 익숙하지 않은 나라 아닌가. 대신 돌려 말하고, 듣는 사람도 대부분 이해한다. 그래서 이번 개정판에는 이런 문항을 제외했다. 의존적 성격 장애도 유사하다. '거절이 두려워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문항도 우리나라에는 적합하지 않다."

―개정판에는 어떤 기준을 적용했나.

"성격 장애를 재분류했다. 지금까지는 문항 15~20개를 환자에게 주고 '그렇다'가 몇 개인지 세는 식이었다. 이제는 공통 문항을 준다. 그리고 강박, 반사회성 등 다섯 기준의 정도 차이를 오각형으로 나타낸다. 상황에 대한 대처 등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한다'와 같은 질문도 줄었다. 경미한 증상일 경우 '성격 곤란'이라는 하위 증후군도 새로 만들었다."

―그 기준이 적용되면 우리나라의 회피성 성격 장애 환자가 줄어드나.

"그렇다. 정확히는 원래 회피성 성격 장애를 앓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맞는다. 길이를 재는 자로 비유를 하자면, 예전 기준은 쓰는 사람마다 길이가 달랐다. 이번 최신판은 오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한국 의사의 참여가 우리나라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은 뭐가 있을까.

"우리 학계에는 '유럽,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는 불가침이다'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다. 내가 그런 편견을 깨는 선례로 남아서, 세계 의학계에 우리나라의 연구 결과가 더 많이 반영되길 바란다."

성실함은 전 세계의 미덕

―국제질병분류 개정에 참여한 계기는.

"개정 위원회에서 추천을 받는데, 내가 '성격 장애'의 아시아권 대표로 거론됐다고 한다."

―추천은 어떻게 받았나.

"2005년 검사인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그때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 지금 모두 관련 학계에서 유력한 교수가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같이 일하고 공동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내 지도 교수 중에 런던 킹스칼리지의 재닛 트레저 교수가 있다. 섭식 장애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지난해에는 폭식증 치료에 호르몬 옥시토신이 도움 된다는 사실을 함께 밝혀냈다. 2005년에는 '대영정신과학술지'의 편집위원장인 피터 타일러 교수와 '국가 소득별 학술지 논문 반려율 비교' 연구 등을 수행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의사는 셀 수 없이 많고, 공동으로 논문을 쓰는 경우도 흔한데.

"나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교수들은 분명 많다. 다만 나는 기본을 지켰을 뿐이다. 직접 하겠다는 적극성, 확실한 기브 앤드 테이크. 이게 내가 가진 전부다."

―구체적으로.

"적극성은 '내가 맡은 파트는 내가 완벽히 소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돌아오니 자신과 협업하는 외국 교수의 자료 요청을 후배나 인턴에게 맡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인턴이 그 해외 교수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낸다고 생각해보라. 겉으로 티는 안 내겠지만 '나를 존중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오해가 쌓여 다음 연구는 같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기브 앤드 테이크의 의미는.

"기여한 만큼만 논문 저자권(著者權)에 반영한다는 의미다. 외국은 논문에 지대한 기여를 했을 때만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 하나 넣어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나'며 같이 끼워 넣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외국에서 평소 같이 연구하던 교수가 오면 좋은 식당을 소개해주고, 관광을 같이 다닌다. 친해지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교수가 다음 논문을 발표할 때 '공동 저자가 많던데 내 이름도 한번 써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는 식이다. 당연하게도 '기여한 게 없는데 왜 이름을 넣느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다음부터 그가 거리를 두는 건 당연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이런 분위기가 대세인가.

"그렇지 않다. 원칙을 지키는 교수님도 당연히 많다. 그러나 충분히 실력 있는 국내파들이 외국 학자와 같이 논문을 쓸 때, 앞서 말한 이유로 다음 공동 연구를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기본을 지킨다면 더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에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