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曺奉巖·1899~1959)은 독일식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영미(英美)의 진보적 자유주의 노선에 가깝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정치인 죽산(竹山) 조봉암의 60주기를 맞아 그의 정치 노선을 재평가하는 심포지엄이 열린다.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회장 곽정근) 주최로 열리는 '조봉암의 정치노선과 영미의 진보주의'.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임영신·안호상·이인·이범석·이승만 대통령·윤치영·김도연·조봉암·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김동성·민희식·유진오.

발제자인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는 '조봉암의 정치사상에 대한 재조명'에서 "조봉암의 정치사상은 사회민주주의라기보다는 신생(新生) 자유주의에 가깝게 발전해왔다"고 주장했다. 신생 자유주의는 19세기 후반 영미권을 중심으로 복지 정책과 노동권 향상, 부당 이익 환수 등을 강조한 사상 조류. 20세기 영국 자유당 정부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투옥됐지만 광복 이후인 1946년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을 주도했고 2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 3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1958년 북한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진보당 사건'으로 이듬해 사형당했다.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함 교수는 '조봉암의 정치 노선이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웠다'는 주장의 근거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광복 이후 조봉암이 노동계와 밀접하게 연계된 독일식 사민주의보다는 "수백만의 실업자와 수십만 상이군경, 농민, 노동자 봉급 생활자, 수백만의 월남 피란민과 중소기업자 등 국민 대중의 토대"를 강조하는 '대중 노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또 민족 자본 육성, 민족정기 앙양 등 민족애를 중시한 점도 전통적 사민주의와 다른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1946년 공산당과 결별한 이후 좌우 합작과 중도 통합을 추진하는 등 실용주의적 노선을 택했다는 점이다.

토론자인 장석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조봉암은 제헌헌법 기초위원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면서 "정확하게 말하면 조봉암의 이념은 대한민국 제헌헌법 정신의 실현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