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홍차오 기차역에서 고속열차를 탔다. 남서쪽 84㎞ 떨어진 자싱(嘉興·가흥) 남역까지 걸린 시간은 28분. 다시 택시로 30분쯤 달려 메이완제(梅湾街·매만가)에 도착했다. 이곳 76호는 김구가 윤봉길 의거 후 은신한 곳. 서남호(西南湖) 호숫가에 옛집이 그대로 있다. 지난 2월 26일 오전 집으로 들어서자 관리인이 '김구 피난처'라고 적힌 현판을 닦고 있었다. "문 옆에 내걸 현판"이라고 했다.

자싱 '김구 피난처'의 2층 침실 모습. 바닥 판자를 들어내면 1층으로 이어져 피신할 수 있는 구조다. 오른쪽 사진은 이승만이 1927~1931년 사용한 워싱턴 구미위원부 건물.

청년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를 벌인 때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점령했다(만주사변). 일본 해군 육전대는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주둔 중국 제19로군을 공격하고(상해사변), 2월 육군 3개 사단을 증파했다. 3월 1일에는 청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일왕을 노린 이봉창 의거(1932년 1월 8일), 일본 상하이 사령관 등을 폭살한 윤봉길 의거(4월 29일)는 이런 상황에서 일제 심장부를 공격한 대사건이었다.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장개석)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했다"고 격찬했다. 김구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주목하는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로 떠올랐다.

김구는 윤봉길 의거 후 미국인 목사 피치의 집에 숨어 있다가 1932년 5월 중순 상하이를 탈출했다. 김구가 상하이 밖으로 나간 건 임정 수립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일제가 현상금 60만원을 걸었다. 피신 장소는 국민당 정부와 긴밀한 관계였던 자싱 지역 유지 주푸청(저보성)이 제공했다. 김구 숙소는 2층에 있었다. 침실 바닥 나무판을 들어내면 아래층으로 연결된다. 바로 호숫가로 이어져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는 구조다. 중국인 여자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를 이때 만나 '부부처럼'(백범일지) 5년을 지냈다. 현재 1층은 전시관으로 꾸몄다. 인근에는 이동녕·엄항섭 등 임정 요인이 은신한 집이 있다.

윤봉길 의거 후 자싱에서 피신할 때인 1933년 무렵 김구(왼쪽)가 임정 요인 이동녕(가운데)·엄항섭과 함께했다. 김구는 자싱과 항저우 임시정부를 오가며 활동했다.

김구는 피신 중이던 1933년 5월(추정) 안공근·엄항섭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가서 장제스와 회담했다. 매달 경상비 5000원을 지원받고 중국 중앙군관학교 내 한인특별반을 설치했다.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은 자싱에서 서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항저우로 피신했다. 김철·조완구·조소앙·송병조·차리석 등은 항저우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했다.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에 걸친 임시정부 이동 시기의 시작이다.

이승만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하와이에서 다시 미 본토로 건너갔다. 1931년 12월16일 워싱턴 국무부에 찾아가 스팀슨 국무장관 앞으로 편지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만주의 자원을 손에 넣고 침략 노선을 강화할 것이기에 세계 문명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일본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므로 새로운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이 강경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은 1932년 12월 23일 뉴욕항을 떠나 이듬해 1월 5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했다.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리튼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논의될 예정이었다. 1933년 2월 21일부터 열린 제네바 총회는 42대1로 만주국 불승인을 결의했다. 반대 1표는 일본이었다.

1933년 5월 2일 제네바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 임시정부 특명전권수석대표 자격으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완전히 복원됐다.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전권대표로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주석 조완구와 외무장 조소앙 명의로 이승만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파견하는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했다.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가 합류해 이승만을 도왔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국제연맹 외교를 계기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완전히 복원됐다. 이승만과 임정의 관계는 이후 단절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승만은 제네바 회의 기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미국·유럽 기자들을 상대로 일본의 침략성을 고발했다. 리튼 보고서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일본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 사실을 첨부한 '만주의 한국인들'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결국 일본은 3월 27일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했다. 이승만은 소련의 협조를 모색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갔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 위협을 느끼는 소련이 한국 독립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승만이 크렘린 건너편 호텔에 짐을 풀었을 때 소련 당국은 비자 발급이 실수였다면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이승만은 일기에 적었다. '일본인들이 나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고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일본과 마찰을 피하려고 하는 소련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에게 제네바 활동은 개인적으로도 큰 선물이었다. 레만 호숫가 호텔 식당에서 평생의 반려자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이승만이 쉰여덟 살, 프란체스카가 서른세 살이었다.